누구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책과 삶]

선명수 기자 2020. 11. 2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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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뢰 연습
수전 최 지음·공경희 옮김
왼쪽주머니 | 436쪽 | 1만5000원

누구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미국 작가 수전 최의 장편 <신뢰 연습>은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소설은 1980년대 미국의 남부 도시, 한 유명 예술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이 학교 연극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연기 교사인 킹슬리가 진행하는 수업 ‘신뢰 연습’ 시간을 그리며 출발한다.

“ ‘신뢰 연습’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떤 수업은 말하기와 집단 치료의 형식이었다. 또 침묵하기, 눈 가리기, 탁자나 사다리에서 뒤로 자빠지면 학급 친구들이 받아내기 같은 것도 했다.” ‘신뢰 연습’은 일종의 즉흥 연기 수업이다. 이 수업에서 열다섯 살 세라는 같은 반 남학생 데이비드와 사랑에 빠진다.

카리스마 있는 브로드웨이 배우 출신 교사 킹슬리는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학생들은 그의 관심과 인정을 구하고, 심리적으로도 그에게 통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수업은 때로 잔혹하다. 킹슬리는 학생들이 정신적 취약성을 드러낼 때까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라며 매몰차게 밀어붙인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캐런은 킹슬리의 신뢰 연습이 “일종의 포르노”였다고 회상한다. “킹슬리 선생과 하는 작업은 대부분 해방이라는 이름의 통제다.”

청소년기의 서툴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예술의 원재료로 활용하려는 교사로 인해 세라와 데이비드는 멀어진다. 그러던 와중 영국의 예술고등학교 연극팀과 이들을 이끄는 방문교사 마틴, 그의 옛 제자이자 배우 지망생인 리엄이 세라의 학교를 두 달간 방문하면서 소설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세라와 동급생 캐런은 이 방문자들과 함께 어느 날 오후를 보내고, 이날의 사건은 두 사람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10대 시절 욕망과 감정, 현재·과거를 교차하는 증언은 반전에 반전
성적인 강요, ‘동의’였나…진실의 ‘퍼즐 맞추기’에 빨려드는 독자
퓰리처상 후보 올랐던 한국계 미국인 작가, 첫 전미도서상 수상작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는데 모두 ‘심리 연습’이란 같은 제목이 달렸다. 이 가운데 1부에 해당하는 첫 번째 심리 연습이 세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4년 후를 그린 2부는 주변 인물이었던 캐런이 화자가 되면서 소설은 통째로 흔들린다. 14년 만에 세라와 재회한 캐런의 서술을 통해 첫 장의 이야기는 세라가 쓴 소설이었음이 드러난다. 캐런은 세라가 마음대로 각색한 그 시절 이야기를 출간된 소설책을 통해 접하고, 세라를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캐런의 증언으로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이렇듯 작가는 인물들의 ‘신뢰 연습’에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인생이 언제 누구와 재회시킬지, 둘이 옛일을 얼마나 비슷하게 기억할지 아무도 모른다.” 마침내 한 연극 무대에서 캐런과 세라, 데이비드와 마틴이 재회한다. 연극 연출가가 된 데이비드의 초청으로 미국을 다시 찾은 마틴은 영국에서 자신의 학생들을 성추행한 의혹을 받았다. 데이비드의 연출과 마틴의 각본으로 마틴, 캐런이 무대 위에 오른다. 이 무대 위에서 캐런은 복수를 단행하고, 14년 전의 진실이 차츰 얼굴을 드러낸다.

작가는 마틴과 재회하는 캐런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묘사한다. 취약한 10대들에게 마틴을 비롯한 성인 남성들은 일종의 ‘포식자’였다. 소설은 14년 전 사건, 당시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권력과 권력남용, 성적인 강요와 동의 문제를 다룬다.

캐런은 마틴의 영국 학생들과 달리 자신은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었다고 여기지만, 작가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인지하지 못한 채로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캐런의 불안한 심리를 통해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시종일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소설은 마지막 장, 자신의 생모를 찾으려는 20대 여성 ‘클레어’가 새로 등장하며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다.

독자들은 세라, 캐런, 클레어라는 세 명의 여성 목소리를 하나씩 따라 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혼란은 계속된다. 누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모든 삶의 이야기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구성되고 윤색되듯, 어떤 이야기는 거짓으로 드러나고 독자들은 신뢰를 철회하게 된다. 그렇게 어느덧 읽는 이도 이들의 ‘신뢰 연습’에 참여하게 된다.

인물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진실을 찾아가고 과거의 상처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작가는 10대 시절의 욕망, 혼란과 같은 예민한 감정들과, 그런 과거를 기억하거나 외면하는 방식을 세밀하고 긴장감 있게 그린다.

2004년 <미국 여자>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던 작가 수전 최는 자신의 다섯 번째 장편인 이 소설로 지난해 전미도서상 소설상을 수상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유대계 어머니를 둔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데뷔작 <외국인 학생>에서 한국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려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이 경계인으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현재 예일대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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