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일꾼들 '구정물 맥주'를 마셨다고? [책과 삶]

문학수 선임기자 2020. 11. 2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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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
윌리엄 보스트윅 지음·박혜원 옮김
글항아리 | 360쪽 | 1만8000원

누가 맥주를 만들었는가. 책에 따르면 “맥주는 레시피가 필요한 최초의 음식” “인류 최초의 가공식품”이었다. 와인은 우연히 발견됐지만,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고와 기술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창조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맥주의 발원지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다. 이미 상식으로 통용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저자의 입담이 재치 있고, 묘사가 생생하다. 일단 저자는 최초의 문명이 건설됐던 메소포타미아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아득한 옛날, 그 땅에 맥주 브루어(Brewer·양조자)가 살았다. 물론 누구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남자였을 수도, 여자였을 수도 있다. 하여튼 누군가 보리로 맥주를 빚었고, 사람들이 그 음료를 마시며 즐거워했기 때문에 <길가메시 서사시>에 ‘맥주 찬양’이 등장할 수 있었다.

맥주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원한 아주 오래된 음료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맥주가 등장하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맥주를 대량 생산해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에게 배급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고대도시였던 우루크(Uruk) 왕 길가메시의 모험을 다루는 서사시는 왕의 부하였던 ‘엔키두’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신에 의해 진흙으로 빚어진 ‘거친 존재’였다. 온몸에 털이 북슬북슬한 그는 풀을 뜯어먹으며 짐승처럼 살았다. 야만의 존재였던 그가 인간의 삶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맥주였다. 이슈타르 신전(神殿)의 여사제 샴하트가 그에게 빵과 음식을 잔뜩 먹이고 그다음 맥주를 권했다. “엔키두는 맥주를 일곱 잔이나 마셨다네/ 그의 정신은 느슨해졌고 익살스러워졌다네/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그의 얼굴에 빛이 났다네/ (이발사가) 그의 몸에서 털을 벗겨냈다네/ 그는 오일을 발랐다네/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네/ 옷을 입었고/ 사람다워졌다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닌카시(Ninkasi)를 ‘맥주의 여신’으로 숭배했다. 이 여신에게 바치는 ‘닌카시 찬가’에 맥주 레시피가 운문으로 기록됐다. 저자는 그 레시피를 따라 직접 맥주를 만들어본다. “나는 빵을 굽고 적시고 저었다. 불에 올린 냄비에서 맥아즙이 끓자 준비한 향신료를 뿌리고 대추야자를 썰어넣었다. 그런 다음 축축한 곡물빵과 흠뻑 젖어 부푼 대추야자, 그밖의 재료가 섞인 걸쭉한 액체를 커다란 유리 항아리에 부었다.” 이후의 자세한 제조 과정은 생략한다.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거품이 부글거렸고 저자는 마침내 “무덤에서 소생시킨 고대 맥주”를 시음한다. “적어도 마실 만했다. 약간 달면서 신맛이 났다.” 신맛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취향이었다. 그들은 요리에도 식초를 넉넉히 뿌려 먹곤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맥주를 대량 생산해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에게 배급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맥주는 “구정물 수준”이었다. “평민들에게 제공되던 저알코올, 고탄수화물 연료”였다. 맥주를 파는 선술집들도 곳곳에 생겼다. “바빌로니아에서 ‘비트 사비티’(Bit Sabiti)라고 불렸던 맥줏집은 가정에서 맥주를 만들던 주부에 의해 운영”됐는데, “유한계급 술꾼들이 모여 섹스, 범죄와 반역을 계획하는 장소”였다.

저자의 ‘맥주여행’은 연대기적으로 펼쳐진다. 북유럽 샤먼들은 마약 성분의 약초를 가미해 “정말 자극적인”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맥주를 빚었다. 그들은 맥주에 “영적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중세 교회는 술에 취한 이들에게 관대했고 나중에는 아예 수도원에 양조장을 짓는 경우가 빈번했다. 성 베네딕토는 수사들에게 노동을 강조했는데, 그 노동에는 술 빚기도 포함됐다. 베네딕토회 수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브루어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맥주 양조는 자급자족에서 그치지 않고 수익 사업으로 이어졌다. ‘술 빚는 수도원’은 맥주를 팔아 번 돈으로 “구리 주전자, 대형 발효 캐스크(나무로 만든 술통), 싹을 틔운 곡식을 저장하고 건조하는 가마 같은 기구들을 구매”했다.

맥주 파는 수도원의 전통은 지금도 남았다. 벨기에의 성 식스투스 수도원은 ‘베스트블레테렌 12’라는 유명 맥주의 생산지다. 맥주 애호가들에게 ‘베스티’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맥주는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저자는 약간 수다스러운 투로 이렇게 말한다. “먼저 중앙유럽 표준시로 아침 9시에 일어나라. 수도원에 전화를 건다. ‘맥주 전화’라는 게 있다. 아마 통화 중일 것이다. 수도원은 시간당 8만5000통의 전화를 받는다. 포기하지 말고 시도하다 보면 이국적인 억양의 영어를 쓰는 수도승이 언제 와야 하는지 알려줄 것이다. (중략) 수도승에게 40유로를 지불하고 암시장에 되팔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선서한 후 맥주 48병을 조심스럽게 차에 실어라. 차 한 대당 두 상자만 실을 수 있다.”

이어서 맥주를 제조한 농부들, 공장을 소유했던 런던 기업가, 맥주로 세금을 냈던 미국 이민 1세대, 라거를 미국으로 가져온 독일 출신 이민자, 현대의 맥주 광고에 관한 이야기 등이 약간 과장스러우면서도 현란한 문체로 전개된다. 저자는 책에서 갖가지 맥주의 맛을 평하기도 하는데, 읽는 입장에서는 그 표현법이 약간 불편하기도 한다. 예컨대 “유칼립투스 숲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처럼 스모키하다”라든가, “소나무 가지에서 익은 파파야처럼 트로피컬하다”라는 식이다. 저자는 ‘술 마시는 것’이 직업이며 홈 브루어(자가 맥주 제조자)이기도 하다. 맥주를 소재로 한 박학다식이 경쾌한 수다처럼 펼쳐지는 책이다. 저자는 ‘월스트리트 저널’ ‘보나페티’ ‘GQ’ 등의 매체에 글을 써왔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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