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믿음 아닌가..의심하라, 과학으로 [책과 삶]

홍진수 기자 2020. 11. 20. 11: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스켑틱 회의주의자의 사고법
마이클 셔머 지음·이효석 옮김
바다출판사 | 372쪽 | 1만7800원

어느날, 문득 주변의 지인이 생각난다. 그 사람은 잘 있을까 궁금해진다. 5분쯤 그와의 추억을 떠올렸을까, 난데없이 휴대전화가 울린다. 바로 그 지인의 부고를 전하는 전화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내게 죽음을 미리 감지하는 능력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니면 그의 영혼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일까. 어쨌든 인간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 벌어진 것은 분명하다. 영혼도, 신도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이때 누군가 나서서 당신의 환상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1년 동안 당신이 아는 사람 10명은 죽고, 당신은 이들을 1년에 한번은 생각한다고 가정하자. 1년을 5분 단위로 쪼개면 10만5120개의 구간이 나온다. 그럼 당신이 그와 같은 경험을 할 확률은 1만512분의 1이다. 당신이 그해 사망한 그 사람을 10만5120개의 구간 중 한 구간에서 생각했을 때, 그가 죽거나 혹은 그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확률 말이다. 물론 이는 매우 낮은 확률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2015년 미국)에는 3억2100만명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이 나라에서 1년에 3만537명은 된다는 말이다. 하루로 계산하면 매일 84명이 이런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어때, 이래도 당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긴 것 같나?”

유사과학과 음모론, 가짜뉴스 등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회의주의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사진 왼쪽 배경은 2001년 9·11테러 당시 불타고 있는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 오른쪽은 중간선거를 앞둔 2018년 8월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미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리 유세에서 한 참석자가 온라인 음모론 집단 큐어넌을 뜻하는 글자 ‘Q’를 들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유사과학과 음모론, 그리고 창조론
이 시대를 흔드는 가짜뉴스까지
끊임없이 생산·유포되는 인포데믹
팩트 체크보다 더 유용한 무기로
저자는 ‘회의주의적 태도’ 제시

회의주의자는 이런 사람이다.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현상은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초자연적인 현상’도 그들에게는 그냥 자연적인 현상이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무엇이든 의심한다. 하나하나 따져보고, 근거를 찾아 납득이 되어야 믿는다. 이들의 냉정하고 꼿꼿한 태도에 정이 뚝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인정해야 한다. 이런 회의주의자들이 세상에 난무하는 거짓을 없애고 진실을 지탱한다.

<스켑틱 회의주의자의 사고법>(Skeptic: Viewing the World with a Rational Eye)은 미국의 대표 회의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클 셔머의 에세이 75편을 모은 책이다. 셔머가 2001년 4월부터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매달 쓰고 있는 에세이 중 첫 6년3개월간의 글을 다듬어 2016년 책으로 냈다. 셔머는 “건강과 운이 따라준 덕에 한 번도 쉬지 않고 쓴 것이며, 2026년 4월이면 300편에 도달할 것이니 적어도 몇 권의 책이 더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셔머는 1992년부터 발행된 회의주의 과학저널 ‘스켑틱’의 창간인이며 지금도 발행인 겸 편집장을 맡고 있다.

셔머가 이 책에서 ‘때려잡는 대상’은 주로 유사과학과 음모론, 그리고 창조론이다. 셔머가 이번 책에 들어간 글을 썼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그 정도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020년은 다르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여기에 가짜뉴스를 더해야 하겠다.

코로나19의 확산은 팬데믹이면서 인포데믹(정보 전염병)이기도 했다. 검증되지 않은 온갖 정보들이 온라인·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떠돌아다닌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포털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생산되고 유포된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팩트 체크’를 해도 효과는 크지 않다. 이럴 때 개인의 ‘회의주의적 태도’만큼 확실한 무기는 없다. 불확실한 정보를 접했을 때 심호흡 한번 하고 회의주의적 태도만 견지해도 가짜뉴스나 음모론에 쉽게 현혹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켑틱 회의주의자의 사고법>은 회의주의적 태도의 기초를 다지는 데 아주 적합하다.

똑똑하다고, 학력이 높다고 회의주의가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도 가짜뉴스와 음모론에 쉽게 넘어간다. “많은 사람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다양한 이유로 가지게 되는 믿음은 사실 실험적 증거나 논리적 추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유전적 경향, 부모의 성향, 형제의 영향, 친구들로부터 받는 압박, 교육,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영향을 포함한 인생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개인적 취향과 감정적 끌림 등이 특정한 믿음을 형성한다.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믿음과 무관하게 사실을 나열하고 장단점을 고려해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믿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실제 사실을 자신이 평생 쌓아온 이론, 가설, 직감, 선입견과 편견의 왜곡된 필터를 통해 바라본다.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믿음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데이터를 선택하며 다른 모순되는 데이터는 무시하거나 합리적으로 배제한다.”

미국의 ‘대표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밴 뒷면에 앉아있다. 파인만의 밴 뒷문에는 전자와 광자가 그려져 있다. 바다출판사 제공
근거와 논리가 부족하다 여겨지면
의심하고 또 회의하며 자신을 시험
가설을 검증하는 과학의 작동 필요
다 부정하는 것이 아닌 비판적 사고
팬데믹을 마주한 사회의 필수 덕목

회의주의적 태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학이다. 과학의 기반은 가설의 검증이다. 과학은 늘 의심하고 회의하며 자기 자신을 시험한다. 이와 같은 과학의 작동 방식은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과 신념에 빠져 그릇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아준다. 끊임없이 탐구하는 과학적 태도를 체화하면 환상과 현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고, 우리를 미혹하는 그릇된 정보와 건강하지 못한 신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과학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는 ‘사실’을 이렇게 정의했다. “잠정적인 동의를 보류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 여겨질 정도만큼 확인된 어떤 것.”

책을 읽다보면 과학자들이 통계와 실험,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음모론 등을 무너뜨리는 쾌감이 상당하다. 이를테면 ‘9·11 테러’가 부시 정권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그 증거로 ‘강철은 화씨 2777도(섭씨 1525도)에 녹지만 비행기의 연료는 1517도(섭씨 825도)에 연소한다. 강철이 녹지 않으면 건물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을 내놓는다. 일견 그럴듯하다. 그러나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기계공학과 토머스 이거 박사는 이를 간단하게 반박한다. “강철은 화씨 1200도(섭씨 649도)에서 강도가 50%로 줄어들며, 불길은 9만ℓ의 비행기 연료가 소진된 뒤 카펫, 커튼, 가구, 종이 등 인화성 물질에 옮겨붙었다. 이들은 건물 전체를 불태워 화씨 1400도(섭씨 540도) 이상이 유지되었다. 이 때문에 수평 방향으로 놓인 강철 트러스 양쪽에 수백 도의 온도 차가 생겨 트러스가 뒤틀렸고, 건물을 지탱하는 수직 강철 컬럼에 수평 트러스를 고정하던 앵글 클립이 끊어졌다. 트러스 하나가 끊어지자 다른 트러스들도 끊어졌고 한 층이 무너지자 팬케이크 효과에 의해 다음 층들이 무너지면서 50만 톤의 빌딩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행여나 회의주의가 사람을 융통성 없고, 인정머리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회의주의는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근거와 논리가 부족한 것’을 의심한다. 합리적인 수준에서 의심하고, 충분한 근거가 나오면 주저없이 마음을 고쳐먹기도 한다.

회의주의(Skeptic)는 ‘사려 깊은’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스켑티코스’(Skeptikos)에서 온 단어다. 또 라틴어에는 ‘탐구하는’ 또는 ‘성찰적인’이라는 뜻의 ‘스켑티쿠스’(Scepticus)가 있다. “즉 회의주의는 사려 깊고 성찰적인 탐구라 할 수 있다. 회의주의적이 되는 것은 비판적 사고라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회의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그 어디보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