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性的 쾌락·소비 자본주의.. '사랑의 종말'을 부르다

나윤석 기자 2020. 11. 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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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사랑은 왜 끝나나 | 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도덕 굴레벗은 性의 자유·쾌락

사랑 떠받치는 토대로 바뀌어

마치 물건 고르듯 상대방 선택

진지함 거부하고 ‘캐주얼 섹스’

남성권력 강화·시장화의 산물

“자본주의는 어떻게 낭만적 사랑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는가.”

모로코 출신 감정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쓴 ‘사랑은 왜 끝나나’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다. ‘감정 자본주의’ ‘사랑은 왜 아픈가’ 등에서 감정과 사랑을 사회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저자가 이번엔 육체가 감정을 덮어버린, 그래서 사랑이 부재하게 된 오늘의 모습을 자본주의 진화의 맥락에서 되짚는다.

20세기에 등장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의 성 해방 운동은 쾌락을 죄악시하던 전근대적 가부장제와 종교 관념을 혁명적으로 뒤집었다. 저자는 ‘섹슈얼리티’가 종교와 도덕의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성적 자유와 쾌락이 사랑을 떠받치는 토대”가 됐다고 말한다. 욕망을 인정하는 성적 자유는 “강제 결혼 또는 사랑 없는 결혼에 저항할 권리”를 보장했고, “성차별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데도 기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쾌락 추구가 소비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인터넷 기술과 결합하면서 “낭만적 사랑은 질곡에 처했다”. 짝짓기 사이트 ‘매치닷컴’이나 ‘틴더’ 같은 데이트 앱은 사랑의 종말을 보여주는 대표적 단면이다. 섹스만을 목적으로 한 만남이 이뤄지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사람들은 “슈퍼마켓에서 물건 고르듯” 상대를 선택한다. 사회학자 뤼크 볼탕스키는 ‘상대가 지니는 유일무이함을 부각하는 것이 사회성의 본질’이라고 말했는데, 저자는 ‘사회성’을 ‘사랑’으로 바꿔놓아도 무리가 없다고 말한다. 본래 사랑은 상대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행위지만, 마치 냉혹한 자본주의 논리를 추종하듯 ‘선택’과 ‘쾌락 충족’ ‘폐기처분’이 반복되는 모바일 공간에서 상대는 그저 ‘타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타인과는 “함께 미래를 기획할 일”도 없고, 이런 타인과의 관계엔 ‘배려와 상호호혜의 규칙’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첫 출시 이후 몇 년 새 1억 명 이상이 들락날락한 ‘데이트 앱’은 섹스가 자유시장 경제에 포섭된 공간이자 인간관계의 시장화를 보여주는 문화적 징후다.

저자는 이처럼 진지한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육체의 만남을 ‘캐주얼 섹스’라는 용어로 규정한다. 원나이트스탠드, 즉흥 섹스, 플링(짧은 기간에 맺는 성관계) 등을 포괄하는 이 개념은, 칼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을 ‘상품’ 취급하며 오르가슴 쾌락이라는 교환가치로 바꿔버리는” 사랑의 뒤틀린 행태를 꼬집는다. 책에는 성인 남녀 92명에 대한 인터뷰가 군데군데 삽입돼 있는데, 이들의 육성은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종말에 이른 낭만적 관계를 생생히 증명한다. 저자가 주로 활동하는 영미권과 유럽의 사례들이지만, ‘썸타다’라는 신조어가 새로운 세대의 사랑을 지칭하는 말처럼 돼버린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이질감 없이 다가오는 이야기다. 저자는 “오직 자유만을 중시하는 쾌락은 역설적으로 존재론적 불안을 낳고, 고독이라는 ‘감염병’을 부른다”고 한숨짓는다.

비록 절절한 구애와 로맨틱한 서사로 이뤄진 사랑은 드물어졌다고 해도,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캐주얼 섹스 사회’는 언뜻 남녀 평등주의에는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인식에 고개를 저으며 “캐주얼 섹스는 남성적 권력을 강화하는 남성 경제의 산물”이라고 단언한다. 일회성 만남이 데이트로 한 발짝 진전된 사이는 ‘가지고 논 것’과 ‘관계’의 중간쯤 어디에 위치하는데, 이때 남성은 “캐주얼 섹스를 통해 성적 권력을 과시하고, 다른 남성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런 문제의식은 불법적으로 촬영한 성관계 영상을 타인과 공유하다 적발된 국내 사건들을 떠오르게 한다.

성과 사랑의 문제에서 남성중심주의를 강화하는 핵심 기제는 영화와 포르노 등의 대중문화산업, 그리고 식당 종업원과 항공기 승무원 등이 일하는 서비스 산업이다. 이들 분야에서 현대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시선을 통해 형성되고, “여성의 매력적인 몸은 소비문화의 주춧돌이자 생산 영역에 활기를 불어넣는 ‘에로틱 자본’”으로 기능한다. 저자는 “여성의 가치를 멋대로 착취하는 상황은 현대 여성의 사회적 실존이 처한 역설”이라고 꼬집는다.

이 책이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실천하자거나 결혼으로 맺어진 전통적 가족 공동체를 복원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관계의 윤리’를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사랑은 육체의 성적 욕망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으며, “감정과 헌신의 수준을 높일 때”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말하기 쑥스러운 시대,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진정한 관계 맺기를 숙고하게 만드는 책이다. 531쪽, 2만9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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