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피터 래빗 작가가 발견한 '지구 최강 생명력'의 존재 [전문가의 세계 - 김응빈의 미생물 '수다' (12)]

김응빈 교수 2020. 11. 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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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옷'의 씨줄과 날줄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어느덧 계절은 입동을 지나 만추를 뒤로하고 겨울로 향하고 있다. 옷을 껴입는 우리와는 반대로 나무는 옷을 벗으며 겨울을 맞이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땅에게 겨울옷을 입히려나 보다. 가을 타는 추남(秋男)의 감성적 상상이다. 본시 땅은 옷을 입고 있다. 숲길은 물론이고 동네 산책길에서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땅옷’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돌과 나무 표면에 있는 푸릇한 것들을 흔히들 이끼로 여기는데, 이들의 정체는 ‘지의류(地衣類)’(작은 사진)이다. 정식 과학 용어는 아니지만, 이 한자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땅옷이다. 이끼는 잎과 줄기 구별이 분명치 않고, 관다발이 없는 식물이다. 반면 지의류는 전혀 다른 두 종류 미생물, 곰팡이(진균)와 미세조류가 얽혀 있는 공생체다.

■동화 속에 남긴 지의류

‘곰팡이·미세조류’ 얽힌 공생체
동화 ‘피터 래빗’ 작가가 첫 발견
한 세기 지나서야 학회서 인정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주인공 피터 래빗(Peter Rabbit)이 올해로 120회 생일을 맞았다. 이 토끼를 탄생시킨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1866~1943)는 작은 시골 농장과 숲속을 배경으로 피터와 친구들의 일상을 손수 그린 그림과 곁들여 재밌는 이야기로 들려준다. 그런데 그녀는 동화작가이기 이전에 과학자였다.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포터는 뛰어난 관찰력 덕분에 보통 사람들이 놓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단일 생명체가 아닌 존재, 지의류를 처음으로 알아본 것이다. 1897년 마침내 그녀는 지의류가 서로 다른 두 종이 얽혀 있는 공생체라는 관찰 사실을 담은 논문을 학회에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 당시, 사회는 물론이고 과학계에도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했던 까닭에 포터의 논문은 일단 저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된 데다, 설상가상으로 논문 내용도 보수적인 학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들은 엄연히 다른 생물 두 종이 서로 휘감겨 살아간다는 주장 자체가 불경스러운 헛소리라고 힐난했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포터는 이내 식물 연구를 접고 말았다. 하지만 그대로 그렇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1901년 피터 래빗을 세상에 선보였고,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피터 래빗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이 토끼는 그림책 밖으로 나와 각종 문구와 일상 팬시상품을 장식하는 단골 캐릭터가 되었다. 앞으로 피터 래빗 그림을 볼 기회가 있을 때, 그 주변 배경을 세심히 보기 바란다. 나무나 돌에 있는 푸릇푸릇한 색칠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로 지의류다. 포터는 무시당한 자기 주장을 동화 속에서 마음껏 펼치고 있다. 1997년 해당 학회는 한 세기 전에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고, 하늘에 있는 포터에게 정중히 공식 사과를 했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명예회복이 이루어져 다행이다. 그런데 포터가 과학자에서 작가로 ‘강제 이직’된 것이 어쩌면 인류에게 더 큰 혜택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돌 위에 자라는 암생 지의류. 출처 위키미디아 커먼스

■공생이란?

공생이란 한마디로 부대끼며 같이 사는 삶이다.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하면, 서식지(공간)와 먹이(물질)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는 서로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해를 끼치기도 한다. 결국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상리공생과 기생 모두 공생의 한 형태인 것이다. 현미경으로 지의류를 들여다보면 곰팡이가 조류를 온통 감싸고 있다. 사실은 곰팡이가 조류 안으로 파고 들어가 있다. 감염이자 기생이다.

겉으로만 보면 곰팡이가 조류를 해코지하며 착취하는 모양새다. 자연에서 기생과 상리공생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람이 편의상 그렇게 나누어 말하는 것이지, 정작 당사자 말고는 그 진실을 알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적잖다. 예컨대, 열렬히 사랑하는 남녀를 두고 하나가 밑지는 장사라고 입방아를 찧는 호사가들을 종종 본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말이다. 지의류가 이루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가 아니면 불가능한 삶의 속성’이다.

지의류 분류는 공생 곰팡이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분류학적으로 지의류는 곰팡이 가문에 속한다. 크게 두 종류 곰팡이 자낭균과 담자균이 지의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각 곰팡이를 세분해 현재 400여속(genus) 1600여종(species)에 달하는 지의류가 알려져 있다. 또한 지의류는 서식지와 모양에 따라, 돌에서 자라는 암생, 나무 표면에서 자라는 수피생, 흙 위에서 자라는 토생 지의류와 표면을 비늘처럼 덮는 각상, 잎 모양 엽상, 작은 나뭇가지 같은 수상 지의류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지의류를 이루는 조류와 곰팡이를 따로 떼어 놓으면 자연 조건에서는 대부분 살지 못한다. 실험실 조건에서 홀로 자라는 조류는 광합성으로 만든 탄수화물의 1% 정도를 몸(세포) 밖으로 방출한다. 그러나 조류가 곰팡이와 함께 붙어 자라면 세포막 투과성이 높아져서 광합성 산물의 60% 정도까지 곰팡이에게 나누어준다. 이 통 큰 베풂에서 곰팡이가 받는 혜택은 명백하다. 그렇다고 곰팡이가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광합성을 하려면 햇빛과 이산화탄소에 더해 물과 미네랄이 필요하다. 식물은 토양에서 이를 흡수한다. 하지만 나무 껍데기 또는 돌 위에 사는 지의류에게 이런 호사는 허락되지 않는다. 대신 조류에 착 달라붙어 있는 곰팡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언뜻 놈팡이처럼 보이는 곰팡이가 균사(팡이실)를 길게 뻗어서 물과 미네랄을 열심히 구해 온다. 이 덕분에 조류는 땅에 뿌리를 박지 않고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 또한 곰팡이는 조류를 고체 표면에 부착시키고, 감싸서 보호해 주기도 한다.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린 강인함의 원천

열대와 남북극 등 모든 땅에 존재
두 생물, 감염이자 기생이지만
‘함께’여서 어디서든 생존력 뽐내
지의류, 대기 중 물질 그대로 흡수
이들이 없다면 공기 나쁘다는 것

2008년 유럽우주국(ESA·European Space Agency)은 세균, 곰팡이, 지의류, 씨앗 등을 우주정거장 밖에 약 1년 반 동안 두었다.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지는 미립자와 방사선, 즉 우주선(cosmic ray) 노출에 대한 생존 능력을 비교하기 위함이었다. 실험 결과, 지의류가 생존 최강자 자리를 차지하면서 1+1이 단순히 2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강인함 덕분에 지의류는 열대와 온대는 물론 고산 지대에서 남·북극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모든 땅을 덮고 있다. 지의류는 단순히 땅을 보호하는 옷이 아니다. 많은 생물을 먹여 살리는 양식이다. 대표적으로 툰드라 지역에 사는 순록과 같은 초식동물은 주로 지의류를 먹고산다. 인간도 빠지지 않는다. 깊은 산속 바위나 절벽에 자라서 ‘돌의 귀’라는 뜻을 지닌 고급 식재료, 석이(石耳)버섯도 지의류다. 고산 지대에 서식하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 실타래처럼 주렁주렁 늘어져 자라는 송라(松蘿·소나무겨우살이)는 한방에서 오래전부터 귀한 약재로 쓰여 온 또 다른 지의류이다. 이뿐만 아니라 수소 이온 농도(pH) 변화를 알려주는 리트머스 용지에 들어가는 염료도 지의류에서 추출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토록 강인한 생명체가 대기 오염을 만나면 고양이 앞에 쥐 신세가 되고 만다. 등하교 또는 출퇴근길에 나무와 담벼락, 돌덩이 같은 주변 경관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대로변에 가까워질수록 지의류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반대로 학교 캠퍼스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면 지의류를 만날 수 있다. 깊은 산속에 가면 훨씬 더 크고 다양한 지의류가 즐비하다. 지의류가 적거나 아예 없다는 것은 그만큼 대기가 나쁘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의류는 대기 오염을 측정하는 ‘지표종(indicator species)’ 역할을 한다.

그토록 강인한 이들이 대기 오염에는 왜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강인함을 준 바로 그 포용성 때문이다. 지의류는 대기 중에 있는 물질을 있는 그대로 거의 모두 받아들인다. 공해물질까지도 말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이것저것 가리며 살아갈 여유가 없다.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지의류에게 조야하나마 삼행시를 바친다. “지: 지금 알았네, 의: 의연한 그 모습, 류(유): 유념하리라 그 가르침.”

중국 후한 말기에 활동했던 학자 채옹은 박식함만큼이나 효심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노환으로 몸져누운 어머니 곁에서 3년 동안 극진히 병간호를 했다. 하지만 효자의 지극정성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고, 채옹은 시묘살이로 어머니를 향한 효성을 이어갔다. 그런데 무덤 옆에 있던 두 나무의 가지가 언제부턴가 서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서로 엉켜 한 나무처럼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나무가 채옹의 효성에 감복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연리지(連理枝)’에 얽혀 전해오는 이야기다.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을 뜻하는 ‘연리’는 원래 효심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지의류가 보여주는 만남은 연리지보다 훨씬 애틋해(?) 보인다. 근본이 다른 생명체를 서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찮게 여겼던 미물(微物)이 자칭 만물의 영장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김응빈 교수



1998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미생물 연구와 교육을 해오면서 미생물의 이야기 미담(微談) 중에 미담(美談)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미생물 변호사’를 자처하며 흥미로운 미생물의 세계를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연세대 입학처장과 생명시스템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한국환경생물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SCI 논문 60여편을 발표했으며, 저서로는 <나는 미생물과 산다> <미생물에게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공저) 등이 있다. ‘수다’는 말이 많음과 수가 많음, 비잔틴 백과사전(Suda)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김응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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