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합의'였을까

최재봉 2020. 11. 2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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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도서상 수상 수전 최 소설 '신뢰 연습' 출간

신뢰 연습

수전 최 지음, 공경희 옮김/왼쪽주머니·1만5000원

한국계 미국 작가로는 최초로 지난해 전미도서상을 받은 수전 최의 소설 <신뢰 연습>이 번역 출간되었다. 2014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차 방한했던 수 전 최는 <한겨레>가 마련한 대담에서 “상업 출판의 압력이 문학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며 “어려서부터 독서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Heather Weston

수전 최는 한국계 미국 작가다. 1998년에 발표한 그의 첫 장편소설 <외국인 학생>은 전쟁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대계 여성과 결혼한 아버지 최창(전 인디애나주립대 교수)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었다. 최창 교수는 영문학자이자 평론가였던 최재서(1908~1964)의 아들이니, 수전 최는 최재서의 손녀딸이다. 수전 최는 지난해 다섯 번째 장편인 <신뢰 연습>으로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한국계 작가로는 처음이었다.

<신뢰 연습>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제1부는 예술고등학교 연극과 학생들의 학교 수업 그리고 사랑과 이별, 우정과 질투 등을 그린다. 책 제목인 ‘신뢰 연습’은 킹슬리 선생님이 이끄는 연기 수업의 이름. “‘신뢰 연습’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떤 수업은 말하기와 집단 치료의 형식이었다. 또 침묵하기, 눈 가리기, 탁자나 사다리에서 뒤로 자빠지면 학급 친구들이 받아내기 같은 것도 했다.”

1부의 주인공인 세라와 데이비드는 1학년 때 이 수업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둘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자존심 싸움을 축으로 삼아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반에서 가장 부자인 데이비드와 가장 가난한 축에 드는 세라의 계급적 간극, 여기에다가 사랑에 대한 둘의 견해차가 그들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데이비드에게 사랑은 선언을 의미했다. 그게 핵심이 아닐까? 세라에게 사랑은 둘만의 비밀을 의미했다. 그게 핵심이 아닐까?”

둘의 사랑과 이별은 연극과 학생들 모두의 관심사가 된다. 둘은 일종의 ‘스타덤’에 오른다. 자존심 싸움의 와중에 세라와 데이비드는 학교 음악실 복도에서 즉흥적으로 섹스를 나누지만, 그 일은 오히려 둘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몰고간다. 킹슬리 선생은 ‘신뢰 연습’ 시간에 둘을 마주 앉히고 각자의 그리고 서로의 감정과 화해할 것을 종용한다. 그럴 때 세라는 자주 울고, 데이비드는 입을 굳게 다문다. “오랜 후에야 킹슬리 선생이 그들에게 시킨 연습들이 일종의 포르노였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2부의 주인공인 캐런은 술회한다.

“‘캐런’은 로스앤젤레스의 스카이라이트 서점 밖에 서서 작가인 옛 친구를 기다렸다.”

소설의 제2부는 1부의 중심 사건으로부터 14년 뒤를 배경으로 삼는다. 2부의 첫 문장에서 ‘캐런’의 이름에 홑따옴표가 붙은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부를 좀 더 읽어 나가다 보면 ‘캐런’은 사실 캐런이 아니고, 1부는 14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세라가 그때 일을 변형시켜 쓴 소설임을 알게 된다. 당연히, ‘세라’ 역시 사실은 세라가 아니고 작중 이름일 뿐이다. 그렇지만, 편의상, 2부에서도 세라와 캐런과 데이비드를 비롯한 등장 인물들은 1부(그러니까 소설)의 이름대로 지칭된다.

이 소설 1부에서 캐런은 세라의 급우이지만 그다지 친하지는 않은 사이로 스치듯 등장한다. 조연에도 못 미치는 단역에 가까웠던 셈인데, 2부에서는 그 캐런이 주인공이 된다. 14년 만에 작가와 독자로 재회한 세라와 캐런이 고교 시절과 세라의 소설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캐런과 세라가 매우 가까운 친구였음에도 세라의 소설에서는 그 역할이 다른 친구의 몫으로 넘어갔다. 무엇보다 캐런과 세라가 함께 겪은 성적 모험과 일탈 그리고 그 후유증이 축소되거나 생략되었다. 캐런이 세라의 소설과 소설 일반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 “제대로 된 도구만 있으면 누구라도 날조할 수 있는 재능” “과거를 개작하는 ‘상상력 풍부한 재능’”이란, 캐런이 세라의 소설적 재능을 가리켜 폄하해 하는 말들이다.

데이비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연출자로서 극단을 이끌고 있는데, 그가 세라의 소설을 주변에 열정적으로 홍보하면서도 정작 소설 자체를 읽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캐런은 이해하기 어렵다. 둘이 주고받는 대거리는 소설의 본질과 한계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세라가 널 어떻게 그리는지 보고 싶지 않아?” “그건 내가 아냐. 소설인걸.” “내가 ‘웃기시네’라고 말할 차례네. 소설은 진실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야.”

2부는 데이비드가 연출하는 연극 작품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 연극의 극본을 쓴 영국인 마틴인즉 “캐런을 단순히 건드린 게 아니라 망가뜨린” 사람. 캐런과 세라의 고교 시절, 그들 학교에 친선 방문차 왔던 영국인 교사 마틴과 리엄은 캐런과 세라와 ‘더블데이트’를 즐겼고 그 일은 캐런의 삶에 씻기 힘든 상처를 안겼다. 마틴은 나중에 다른 제자의 ‘미투’ 고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되는데, 데이비드와 캐런은 그것을 합의된 성관계로 보아야 할지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캐런에게 그것은 과거 자신이 연루된 행위와 무관하지 않았다). “청소년기의 경험, 동의와 강압 간의 복잡함”(<퍼블리셔스 위클리>), “여성의 분노와 성적 충동, 십대 때 혼란스러운 불확실한 상황들”(<가디언>), “성별 역할의 논쟁과 교사와 학생 간 역학 관계”(<피플>)와 같은 언론 평들은 전미도서상이 이 소설을 택한 배경을 설명해 준다.

현실과 드라마, 과거와 현재가 얽힌 연극 공연이 파국적 결산으로 치달으면서 2부는 끝나고, 1·2부에 비해 분량이 매우 짧은 3부에서는 생모를 찾는 20대 여성 클레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이야기가 1·2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다만, 이 짧은 에필로그에서도 젊은 여성을 향한 나이 든 남성의 성적 폭력이 묘사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수전 최는 어느 인터뷰에서 할아버지 최재서를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선구적인 영문학자이자 평론가였지만 동시에 친일부역의 얼룩을 지닌 최재서가 그 손녀의 손끝에서 어떻게 빚어져 나올지 궁금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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