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승화된 민주화 정신, 40년 세월을 관통하다

김예진 2020. 11. 1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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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0주년 특별전 '메이투데이' 마무리 앞둬
광주통합병원·아시아문화전당 등서
14개국 86명의 작품 330여점 선보여
세계적 작가들의 '지비커미션' 큰 반향
작품에 광주의 아픈 역사 생생히 투영
광주비엔날레, 2021년 2월 본전 준비
아나 마리나 밀란 등 작가 69명 참여
시오타 지하루 '신의 언어'
굴러온 돌들로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굽이굽이 꺾인 길 위에서 몸이 흔들린다. 이 길의 끝에선 무엇이 나올까, 사람들은 이곳에 어떤 모습으로 끌려 왔을까.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 안에서 종착지에 닿길 기다리는 동안, 40년 전 삶이냐 죽음이냐 경계의 현장으로 시공간을 이동하는 느낌이 든다. 이 길은 바로 1980년 5·18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치료를 받거나 죽음을 맞이했던, 옛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가는 길이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옛 국군광주통합병원(5·18사적지 23호)은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가 5·18 40주년을 기념해 지난 1년간 진행해온 다국적 프로젝트 특별전 ‘메이투데이’를 결산, 마무리하는 상징적 장소다.

메이투데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비슷한 역사를 가졌고, 민주주의 정신을 공유하는 도시 중 대만의 타이베이, 독일 쾰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선정해 자국에서 ‘따로 또 같이’ 전시를 여는 일종의 ‘국제 연합 전시’ 프로젝트다. 광주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메이투데이 전시는 국군광주통합병원을 비롯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무각사 로터스갤러리 등에서 14개국 86명(팀)의 작품 약 330점을 선보인다. 특히 국군광주통합병원 터에는 세계적 작가들이 광주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만든 신작을 한데 모은 ‘지비(GB) 커미션’ 코너가 마련돼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국군광주통합병원 옛터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 자그마한 보안 초소 뒤로 보이는 병원 본관 건물의 외양이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다. 40년 전 깨진 유리창은 날카롭고 무성히 자란 주변의 담쟁이 넝쿨은 날카로운 경계를 감싸고 있다. 역사의 생생한 흔적과, 이후 숨겨지고 방치된 시간의 흐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렇게 저마다 넝쿨에 안긴, 상처받은 건물들을 지나는 길에 ‘산책로’란 표식이 보인다. 세상에 둘도 없을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전시장으로 사용 중인 건물이 나타난다.
광주 무각사 로터스갤러리에 1980년대 광주에서 활발하게 제작된 목판화 작품을 표지에 담아 출판된 책들을 전시한 모습.
건물 내부는 부서지고 방치됐던 ‘그대로’를 유지하려 애쓴 모습이다. 이제는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등의 스위치에는 ‘절전’이라는 40년 전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다. 어느 병실로 쓰였을 방 창문에 장식된 나뭇잎도 남아 있다.
지난여름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빨간색 실타래 작품을 내놓았던 일본인 설치 미술가 시오타 지하루는 이번엔 이 병원에 방 하나를 얻어 새까만 실을 엮은 ‘신의 언어’를 선보인다. 방 안 전체에 검정색 실을 풀고, 그 사이사이로 세계 각국 언어로 된 성경의 페이지들을 부양시켰다. 16세기 일본 국왕 히데요시가 신흥종교 기독교의 확산을 막으려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역사와 당시 사람들의 삶, 그들이 기독교 상징인 성경책을 꺼내지도 못해 구전으로 종교를 전하고, 그 과정에서 믿음이 각색되고 변형됐음을 고찰했던 것이 작품의 단초가 됐다. 이 작품이 설치된 공간이 바로 40년 전에도 실제 ‘기도방’으로 쓰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이 공간에 스며 있는 과거의 기억이 부유하는 성경 페이지들과 함께 공명하는 듯하다. 당시의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존재를 투영한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마이크 넬슨 '거울의 울림'
병원 본관 옆 국광교회 건물에는 미국 출신 설치미술가 마이크 넬슨의 ‘거울의 울림’이 관람객을 맞는다. 작가가 병원 건물에서 떼어 낸 거울들이 천장에서 내려온 가느다란 기둥에 지탱한 채 곳곳에서 관람객을 비춘다. 40년 전 모습 그대로인 거울들에는 손을 씻자는 캠페인이나 ‘1980.3.15 하사관 일동’이라는 기증자가 쓰여 있기도 하고, 군인의 두발규정과 함께 ‘이 정도 길이로 잘라 주십시오. 간호부장 올립니다’는 안내문구를 적은 코팅된 종이가 그대로 붙어 있기도 하다. 텅 빈 공간인데 기억은 빽빽하다. 장소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고, 거울은 자신에 비추어진 얼굴과 장면들은 수정하는 일 없이 축적했다. 작가는 이런 생각에 텅 빈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지만(不在) 형태가 있는(有形) 존재감’을 느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 공간의 거울들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증인이자 그간 목격한 역사로 가득 채워진 암호화된 위패”가 됐다.
내년 2월 26일 시작되는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공개될 콜롬비아 출신 작가 아나 마리나 밀란의 ‘행복한 사람들(Happy people)’ 시리즈. 광주의 젊은 게이머들과 만난 뒤 작업했다. 작가 제공
광주비엔날레 측은 오는 29일까지 특별전 메이투데이를 이어간다. 메이투데이 전시를 마무리한 뒤에는 내년 2월 26일 개막하는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본전 작품 설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태국 출신인 코라크리트 아루나논드차이와 아르헨티나 출신 애드 미놀리티, 미국 갈라 포라스-킴, 콜롬비아 아나 마리나 밀란 등 세계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작가들을 비롯 세계 각국에서 69명이 참여한다. 샤머니즘, 문화적 치유, 억압된 역사 등을 예술로 풀어낼 계획이다. 서구 근대성을 중심으로 놓은 이분법 구조를 깨고 확장된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포부다. 광주의 유산은 마를 줄 모른다.

광주=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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