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흑인 여성으로 산다는 건[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0. 11. 1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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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의 지난해 수상자 발표는 여러모로 화제가 됐다. 한 명의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규정을 깨고 두 명의 공동 수상자를 발표했고, 이 가운데 한 명은 2000년에 이어 19년 만에 다시 한 번 이 상을 수상하게 된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였다. 그 옆에 나란히 선 또 다른 수상자는 영국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61)였다.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그는 수상작인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에서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한 흑인 영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강렬하게 펼쳐보인다.

지난해 부커상 수상자 명단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애트우드가 <시녀 이야기>와 후속작인 수상작 <증언들>에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유구한 억압의 역사를 SF 디스토피아를 빌려 그려냈다면, 에바리스토는 유럽사회에서 흑인 여성이 겪어온 눈물과 고통의 역사를 증언한다.

번역 출간된 지난해 부커상 수상작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레즈비언 연극 연출가 ‘앰마’를 시작으로 12명의 흑인 영국 여성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려준다. 10대 소녀부터 90대 노인까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각 다른 시대와 환경 속에 살아간 이들의 이야기다.

지난해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설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12명의 목소리를 통해 영국에서 살아가는 흑인 여성의 삶을 증언한다. ⓒJennie Scott

소설의 문을 여는 인물이자 작가의 자전적인 면이 가장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앰마’는 성공이 보장되는 작품 대신 고집스럽게 흑인 여성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온 중년의 연극 연출가다. 그가 연출한 새 연극 ‘다호메이의 마지막 여전사’가 극장에서 첫 선을 보이는 날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1959년 영국인 어머니와 나이지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에바리스토 역시 연극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최초의 흑인 여성 극단을 창립했고, 흑인 페미니즘 문화운동을 벌였다. 흑인 여성이란 이유로 배역 등 활동에 제약이 컸기 때문이다. 소설 속 앰마는 “노예, 하녀, 매춘부, 유모, 범죄자 같은 배역을 맡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데 넌더리”가 나 동료 도미니크와 함께 극단 ‘부시 위민’을 만든다.

“그들은 침묵이 지배하는 연극계의 목소리가 될 것이다/흑인 여성과 아시아 여성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것이다/(…)/우리 방식대로 한다/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하윤숙 옮김
비채 | 636쪽 | 1만7800원

소설은 세상의 ‘주류’와 투쟁하는 삶을 멈추지 않아온 앰마부터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동료 ‘도미니크’,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은행 부사장 ‘캐럴’, 낯선 땅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분투해온 캐럴의 엄마 ‘버미’, 슈퍼마켓에서 일하며 아이 셋을 키우는 싱글맘 ‘라티샤’, 성정체성으로 고민하다가 ‘젠더 프리’를 선언한 ‘메건/모건’ 등 열두명의 다채로운 삶의 궤적을 차례차례 펼쳐 보인다.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150여년의 시공간 속에서 서로가 혈연 또는 친분으로 얽혀 있다.

이들은 백인·남성 기득권 중심의 사회에서 피부색과 성별로 인해 온갖 폭력에 짓눌리거나 주변인의 삶을 살아가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이 여성들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비극을 비추면서도 이들이 자신의 삶을 열망하는 힘을, 생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가는 긍지를 놓치지 않는다. 과거보다는 진보했다고 여겨지는 세상, 그러나 시대가 달라져도 더 교묘한 형태로 변주되는 폭력 속에서 새로운 세대인 소말리아 출신 무슬림 여성 ‘와리스’는 말한다.

“난 희생자가 아니야, 절대 나를 희생자로 대하지 마, 우리 엄만 날 희생자로 키우지 않았어.”



흑인 여성 사상 첫 부커상
레즈비언 연극 연출가 ‘앰마’ 등
“아무도 노래하지 않고 듣지 않는”
12명의 눈물과 고통의 목소리서
생에 대한 긍지 놓치지 않고 증언



소설에는 마침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각 장의 마지막 문장에 한 번씩만 마침표가 찍혔을 뿐, 마치 산문시처럼 문장은 쉼표와 행갈이로 흐르듯 이어진다. 여러 작품에서 형식 실험을 해온 작가는 이를 ‘퓨전 픽션(Fusion Fiction)’이라 명명한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문장의 시작과 끝에 구애받지 않고 “각 인물의 머릿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과거와 현재를 넘다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에바리스토는 주류 역사에서 다루지 않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역사, 그 중에서도 흑인 여성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문학에서 흑인 영국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게 불만스러워서 그 존재를 열두명으로 축약했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 속 노년의 흑인 여성 ‘윈섬’이 사랑하는 여성 시인 그레이스 니콜스의 시구처럼 “아무도 칭송하며 노래해주지 않고 아무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이들의 역사를 직조해 낸다.

그 삶이 어떤 빛깔이든,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와 같은 소설이다.


선명수 기자 sms@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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