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일러 권일용] 과학수사 요원들은 제 피를 뽑아 실험했다

한겨레 2020. 11. 1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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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권일용ㅣ전 경정·범죄학 박사

1997년 4월3일 밤 10시께.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아무 이유 없이 한 대학생이 흉기에 여러 차례 찔려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소위 ‘이태원 살인사건’이다. 용의자는 현장에 있었던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와 아서 패터슨. 서로 상대방이 범인이라고 주장을 하였고 기소된 이후 항소심까지는 에드워드 리가 범인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대법원은 양측 주장이 엇갈리고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을 찾지 못하여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에드워드 리에 대해 무죄 판결을 하였다.

에드워드 리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상태에서 유력한 범인이던 패터슨에 대해 피해자 가족들은 검찰의 재수사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단순 흉기소지 혐의로 기소되어 복역 중이던 패터슨은 1998년 8·15 특별사면을 받은 상태에서 미국으로 출국해 버렸고, 이후 이 사건은 누가 범인인지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2009년, 검찰은 재수사를 시작하였고 패터슨을 범인으로 특정한 후 미국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였다. 송환된 패터슨은 결국 사건 발생 20년 만인 2017년에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때 패터슨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혈흔 형태 분석 기법이다. 현장에 뿌려진 혈흔의 모양을 보고 현장 재구성(Crime Scene Reconstruction)을 통해 범인을 특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가 뿌려진 위치, 가해자의 키와 공격 형태, 피해자의 신체에 나타난 상흔을 면밀히 분석하여 서로 상대방이 범인임을 주장하였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피해자를 공격하였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 재구성을 하기 위한 여러 기법이 활용되지만 혈흔 형태 분석은 특히 매우 과학적인 방법으로 행동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에 초기 수사 방향을 설정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는 기법이다.

현장 재구성 기법이 발전하기 이전에는 많은 강력범죄 수사가 용의자의 자백, 자백에 의한 증거물 확보, 목격자나 참고인의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물론 이런 수사 방식 자체가 잘못된 과정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한 현장 재구성과 범죄 행동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과 검찰은 여러 건의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였고 허위자백만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이 재심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혈흔 형태 분석은 ‘피는 날아오는 각도에 따라서 지름의 크기가 다르다’는 물리학적 법칙을 전제로 범죄 현장에 뿌려진 혈흔의 모양을 분석해 범행 당시 상황을 과학적으로 재구성한다. 즉, 혈흔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위치를 파악하고 피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과학적 현장 재구성이 이루어지면 범인이 아닌 사람이 자백을 강요받았을 때, 서로의 진술이 엇갈릴 경우 진술하는 내용과 현장 상황이 다르다는 증명을 통해 진실을 밝힐 수 있다. 물론 범죄자가 의도적인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현장 재구성은 진술 전체의 내용을 평가하는 위력적인 도구이다.

어떤 노력의 이면에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노고가 반드시 존재한다. 2004년 한국 경찰이 혈흔 형태 분석을 체계화하기 위한 실험을 하기 위해서 과학수사 요원들이 직접 자신들의 피를 뽑아서 실험을 하였다. 이런 노력과 열정을 거쳐 2016년 대구지방경찰청은 사람 피와 점도·탄성이 90% 이상 동일한 모조 혈액을 개발하였다.

과학수사의 발전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일들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려는 인권적 노력이라는 점이다.

범인을 빨리 검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과학수사의 다양한 분야를 발전시키는 일에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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