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참 모진 학습기회들

김혜영 2020. 11. 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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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여성이다.

해리스 당선자의 감동적 연설이 빛을 보기 꼭 이틀 전 국내에선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의 '학습기회' 발언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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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6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1차 서울 시장보궐선거기획단 회의에서 참석자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여성이다. 7일 그의 승리 연설에 세계는 환호했다. “제가 부통령직을 수행하는 첫 여성일지라도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모습을 지켜보는 어린 여성들은 우리나라가 가능성의 국가라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도약보다 이를 바라볼 누군가를 먼저 떠올렸다. 그래서 더 가슴을 울렸다.

그가 위력적 정치인으로 각인된 건 청문회를 통해서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장면은 이렇다. 2018년 9월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 인준 상원 청문회에서 그가 후보자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변호사가 운영하는 로펌의 직원과 로버트 뮬러 특검에 대해 상의한 적이 있느냐”고 캐묻는다. 즉답이 나오지 않자 해리스 당시 상원의원은 정면 응시 속에 “예, 아니오로 답하라”거나 “제 질문은 매우 명확하다"는 추궁을 이어갔다. 이 압도의 기술은 그를 미국판 청문회 스타로 만든다.

해리스가 연 ‘가능성의 땅’은 우리에게도 놓여 있을까. 청문회를 다시 보다 문득 생각은 엉뚱한 지점에 멈췄다. 해리스가 만든 ‘질의의 좋은 예’처럼 한 의원의 추궁에 누군가 완벽히 궁지에 몰리는 일이 여의도에선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여의도에는 ‘회피 답변의 갖은 예’와 ‘말 돌리기의 숙련공’들이 넘친다.

수사 중인 사안이라 말씀 드리기 곤란하다. 재판 중인 사안이라 답변이 어렵다. 국무위원의 개인 견해를 언급 드리기는 부적절하다. 다른 부처의 소관사항이라 답할 수가 없다. 상대방이 있는 문제라 답변이 난처하다. 개인 정보에 관한 사항이라 답에 제약이 있다. 피해자가 있는 문제라 양해 부탁드린다. 계속 쓰면 책 한 권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잠시 회피의 기술이 엇나갔던 것일까. 해리스 당선자의 감동적 연설이 빛을 보기 꼭 이틀 전 국내에선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의 ‘학습기회’ 발언이 터져 나왔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종합정책질의에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문 의혹 사건이 ‘권력형 성범죄가 맞느냐’는 원론적 질의에 이 장관은 ‘수사 중인 사안’ 카드를 썼다. 하지만 ‘838억원이나 드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피해자나 여성에겐 어떤 영향을 미치냐’는 질의에는 엉뚱하게도 ‘전 국민 학습기회가 된다’는 답으로 상황을 피해가려다 되레 논란만 낳았다.

애써 짐작하자면, 누군가는 두고 두고 깨닫는 바가 있지 않겠냐는 뜻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세계는 대체로 아무 배울 구석이 없는 쪽으로, 교훈ㆍ인과응보 같은 건 없는 방향을 향하고 있다. 아이와 시민들은 그런 불온한 가능성의 땅만 생생히 보고 있다.

유력 정치인의 성범죄 의혹을 폭로했다간 우선 곤경에 처하기 일쑤인 땅, “살려고 미투를 택했는데, 되레 화형대 위 마녀 취급”을 받아야 하는 땅, 가해자의 정치적 동료들이 나서 위증과 2차 가해에 앞장서는 땅, 어느 정당이든 분노한 세입자의 편은 자처해도 내 편이 되긴 어려운 땅, 평생 ‘민주주의 교과서’를 자임할 것 같았던 이들 조차도 선거 앞에선 ‘정치공학 실용서'가 되고 마는 땅. 참 모진 ‘학습의 기회’들이다.

선거의 시계가 빠르게 돌기 시작한 지금, 여권은 더 무겁고 아프게 답해야 한다. 누구를 지키기 위해 다시 승리와 재집권을 다짐하는가. 지금은 정작 누가 무엇을 배울 시간인가. 이제껏 학습자들의 뇌리에 새겨진 건 ‘말해도 변하는 건 없다’, ‘당해도 침묵 하는 게 낫다’는 오답뿐이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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