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에 내리는 눈 - 황동규 [위성락의 내 인생의 책 ④]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서울대 객원교수) 2020. 11. 1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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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 때 찾게 되는

[경향신문]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까이하며 꺼내 보는 시집을 들라면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이 시집은 시인 황동규의 초기 시들을 모은 것이다.

시인은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 구조 속에서, 현실 속의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지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맞서서 시인이 취하고 있는 기품 있는 자세가 마음에 끌린다. 한편 시인은 그런 담담하고 지적인 거리 두기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잔잔한 슬픔을 감추지 않고 노래하고 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너무 많이 알려진 ‘즐거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서도 유사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는 1950년대 후반, 시인이 고교생일 때 썼다고 한다. 수십년 후에 이 시가 영화 <편지>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이런 독특한 사랑 노래를 고교생이 썼다니 놀라울 뿐이다.

또 이런 구절은 어떤가. “오 눈이로군/ 그리고 가만히 다닌 길이로군/ 입김 뒤에 희고 고요한 아침/ 잠간 잠간의 고요한 부재/(중략) 나는 꿈꾼다, 꿈꾼다, 눈 빛 가까이/ 한 가리운 얼굴을/ 한 차고 밝은 보행을”(‘눈’)

사실 황동규를 처음 만난 것은 강의에서였다. 교수로 처음 만났고, 그의 시를 접한 것은 좀 나중이었다. 교수 황동규는 시인 황동규와 다른 인상이었다. 그러다가 문학평론가이자 황동규의 가까운 친구인 김현 교수를 통하여 황동규의 시 세계를 더 알게 되었다.

그때 이래 황동규의 시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 삶 속에서 대면할 수밖에 없는 팍팍한 현실을 접할 때마다, 찾아 읽어 보게 하는 마력을 황동규의 시는 가지고 있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서울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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