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어렵고 아픈 이름..소설 <물 그림 엄마> 펴낸 한지혜 작가 인터뷰

선명수 기자 2020. 11. 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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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최근 출간된 소설가 한지혜의 세 번째 소설집 <물 그림 엄마>(민음사)에는 ‘엄마’의 존재를 직시한 단편소설 여러 편이 수록됐다. 한 작가는 책 말미 ‘작가의 말’에 “엄마를 마음 편히 사랑하지 못했던, 엄마가 내내 아픔이었던 이들에게”라고 썼다../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반복되어 익숙해지는 기적은 기적일 수 없었다. 엄마가 세 번쯤 살아나자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하는 의사들의 목소리에 차츰 권태가 꼈다. 이건 기적입니다라고 더 이상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다. 권태는 임종을 지키기 위해 그 때마다 병원으로 달려온 자식들에게도 있었다. “세상천지에 당신이 가장 불쌍하고 안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신밖에 위할 줄 몰랐”던 엄마는, 살아온 삶이 그랬던 것처럼 악착같이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더 나아가 자식들의 자식으로 환생하고 싶다는 말도 한다.

한지혜의 세번째 소설집 <물 그림 엄마>(민음사)에 수록된 단편 ‘환생’은 엄마의 죽음과 마주하는 딸의 이야기다.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순 없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만은 없는 “늘 어렵고 아픈 이름”. 소설은 모녀가 영원히 이별하는 순간을 그린다. “나는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냥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안녕, 엄마’라고.”

최근 출간된 <물 그림 엄마>에는 이렇듯 ‘엄마’의 존재를 직시한 소설이 여럿 담겼다. 지난 9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한 작가는 “지난 10년간 발표한 소설을 묶어 냈는데, 묶고 보니 ‘엄마’라는 화두가 공통적으로 담겨 있어서 저도 놀랐다”며 “그때그때 저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이야기를 소설로 썼던 것 같다”고 말했다.

소설은 몇개의 단어로는 정리할 수 없는 엄마와 딸의 복잡한 관계를 진득하게 들여다 본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단편 ‘환생’이 대표적이다. 딸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말에서 긴 여운이 남는다. 한 작가는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가 있고 그 말을 하기 위해 화해가 먼저 필요한 관계가 있다”면서 “그 화해의 단계, 경계에 놓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 “엄마를 마음 편히 사랑하지 못했던, 엄마가 내내 아픔이었던 이들에게”라고 썼다.

소설이 그리는 ‘엄마’들은 전형적인 모성상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다. 작가는 무한한 사랑과 헌신의 존재로 만들어진 ‘모성 신화’를 깨고 여러 층위의 욕망을 지닌, 복잡하고도 고유한 존재로서의 엄마를 직시한다. 어떤 엄마는 자신의 고단한 삶을 토로하며 자식들에게 이러저러한 청구서를 내밀기도 하고(‘환생’), 어떤 엄마는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딸의 신혼여행지까지 따라온다(‘물 그림 엄마’). “왜 나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인 동시에 모든 아이의 엄마여야 하는 건가요”라고 따져 묻기도(‘함께 춤을 추어요’), “아이를 사랑하지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풀어 놓기도 한다(‘누가 정혜를 죽였나’).

한 작가는 “엄마에 대한 고정관념에 반기 내지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제 경험의 축에서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엄마 이전에 개별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존재였어요. 그런 엄마는 비난받아야 하는, 부정당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묻고 싶었어요. 고정관념 밖에 서 있는 엄마가 어떤 면에서는 가장 타당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소설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작가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는 마음에 대해, “잠들고 싶지만 잠들기 두려운 날 같은,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에 대해 끈질기게 이야기한다. 단편 ‘으라차차 할머니’에서도 이 시리고도 뜨거운 관계의 온도가 그려진다. 생계에 밀려 가족 안에서도 소외된 ‘나’에게 할머니가 그런 존재다. 나도, 할머니도 척추장애를 가진 ‘꼽추’다. 핏줄로 연결된 진짜 외할머니인지, 아니면 ‘나’를 받아주는 과정에서 장애를 안겨준 산파인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와 나는 “마치 넓은 사막에서 만난 외봉 낙타 두 마리처럼” 등을 기대고 살아간다. “할머니와 나는 오랫동안 서로를 미워하거나 구박하거나 증오했다. 그런데도 결국 이렇게 둘만 남았다. 우리는 서로 미워했지만 다른 사람은 우리에게 아예 무관심했다.”

어느 새벽 할머니는 ‘내 이름은 김순녀’로 시작하는, 90년 인생을 정리한 공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파란 많고 비루했던 삶과 달리 공책 속 할머니는 장애를 딛고 살아온 아름답고 강인한 여성이다. ‘나’는 진실인지 허풍인지 알 수 없는 할머니의 생을 담은 공책을 찢어 꽃을 접는다. “가마는 몰라도 김순녀 여사 90년 생애에 꽃을 달아줘야 할 것 같다. 어차피 가마 중에 으뜸 가마는 꽃가마 아니던가.”

한 작가는 “‘으라차차 할머니’는 어떤 태도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나에게 단 한 번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당면한 삶이든 죽음이든 처한 환경이든, 그런 태도를 선언하는 소설요. 그래서 비참하고 구질구질한 서사인데도, 그 소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김순녀 여사의 신산한 삶처럼, 소설 속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너덜너덜하고 때로 비참한 삶의 한복판이다. 하지만 작가의 천연덕스럽고도 유머러스한 서술로 이런 상황 속 인물들은 더 없이 생동감 있게 빛난다. 그래서 대다수의 소설이 죽음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유쾌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이 소설들이 전하는 특별한 온기란 그런 것이다. 황량한 사막에서 만나 한 때 서로의 등을 기댄 외봉 낙타처럼, 그게 이별일지라도 “으라차차 기지개를 켜고 당신 갈 길”을 오래 지켜봐주는 어떤 마음처럼 말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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