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통치행위는 없다

기자 2020. 11. 1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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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운 논설위원

헌법 조항 어디에도 ‘統治’ 없어

協治 외면 국정 장악 수단일 뿐

정책 결정의 불법은 처벌 대상

文정권, 탈원전을 통치 행위 주장

최재형 원장·윤석열 총장 맹공

감사·수사, 국익 自害 드러낼 것

대한민국 헌법의 본문 10개 장(章) 130개 조(條), 부칙 6개 조를 아무리 찾아봐도, 제4장 제1절 대통령 조항의 66조부터 85조를 눈을 씻고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단어가 있다. 통치. 통치가 없으니 당연히 통치행위란 말도 헌법에는 없다. 통치는 법적 용어가 아니라 정치적 주장이다. 정치학에 나오는 통치(統治·reign)는 정책 결정이 특정 개인·소수 집단에 좌우되며, 강제력을 동원해 사회를 장악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공포 정치(reign of terror)가 대표적 통치 행태다. 통치의 반대 개념이 자치 또는 협치(governance)다. 따라서 어떤 정치 세력이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인 비헌법적 통치를 운운하게 되면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치·협치와는 멀어진다는 뜻이다. 월성 1호기 조기 폐쇄가 통치행위라고 강변하며 감사원과 검찰을 비난하는 문재인 정권의 행태가 정확하게 보여준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세 차례 통치행위 논란이 있었다. 첫째, 1993년 감사원의 율곡(군 무기 획득) 사업 및 평화의 댐 감사. 율곡사업 감사의 핵심은 1991년 공군 차세대 전투기 기종이 F-18에서 F-16으로 바뀐 과정에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관여했는지 여부. 평화의 댐 감사의 핵심도 1987년 북한의 수공(水攻) 능력을 과장하는 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관여했는지 여부였다. 감사관들은 ‘통치행위는 감사하지 않는다’는 감사원 내규 때문에 주저했다. 그러나 대법관 출신 이회창 원장은 헌법이 규정하지 않는 통치행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두 전직 대통령을 서면으로 감사했다. 감사원이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이라는 성역을 깨면서 이후 검찰이 내란죄 등으로 두 사람을 수사하는 중요한 선례가 됐다.

둘째, 대북 송금 수사.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4억5000만 달러를 송금하도록 했던 사실이 2003년 감사원과 특별검사를 통해 드러났다. 김대중 정권 사람들은 “통치행위였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회담 자체는 사법 심사의 대상이 아니지만, 송금의 불법은 처벌 대상이라고 판결했다. 관련자들은 외국환거래법 등 위반 혐의로 처벌됐다. 셋째, 4대강 사업. 2013년 10월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의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주무 장관이었던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VIP 통치행위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답변했다. 감사원 내규의 ‘중요 정책 결정은 감사 대상이 아니다’는 조항을 지목했다. 그러나 성용락 감사원장 직무대행은 단서 조항에 정책 결정의 기준이 되는 사실·자료·정보의 오류는 대상으로 적시했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전례를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탈원전 과정의 불법과 비리는 당연히 감사와 수사의 대상이 된다. 한국수력원자력과 회계 법인의 경제성 조작,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의 공문서 무단 삭제는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산업부와 청와대 관계자의 역할 또한 조사해야 한다. 둘째, 정권의 대표 정책에 대한 감사와 수사에는 당연히 거센 저항이 뒤따른다. 율곡사업·평화의 댐 감사 당시 정보기관 요원들은 감사원 출입기자들까지 찾아다니며 이회창 원장의 비리를 캤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동교동계와 호남 일부가 반(反) 노무현으로 돌아서 정권의 지지 기반이 흔들렸다. 4대강 감사와 수사는 보수 정당 내 친이·친박 세력의 갈등을 여전히 아물지 않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전 정권 감사·수사도 그 정도인데, 살아 있는 정권의 대표 정책에 법적 잣대를 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탈원전 감사는 최재형 감사원장을 친문 세력의 공적으로 만들었으며, 수사는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윤석열 검찰총장을 몰아내는 데 여권이 총출동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세 차례 통치행위 논란을 이겨냈던 감사원은 탈원전 관련 감사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해 검찰에 넘겼다. 검찰이 수사를 통해 감사 결과를 확인하면 탈원전 정책의 실상이 적지 않게 드러날 것이다. 정책 평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탈원전은 다르다. 과정뿐만 아니라 정책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류 에너지 전문가들이 입을 모은다. 수사 결과도 탈원전이 통치행위가 아니라 국익 자해라는 평가를 뒷받침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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