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정신의 끝판왕 세종의 '천기누설'.."공중해시계를 종로에 내걸라"
[경향신문]
“때를 아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밤에는 자격루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려워…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해에 비쳐 각(刻)과 분(分)이 환하고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1434년(세종 16년) 10월2일 <세종실록> 기록이다.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다는 내용이다. 즉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시내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때를 아는 시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라 할 수 있다.
■애민정신의 끝판왕
실록기사를 뜯어보면 세종은 가히 애민정신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한글도 창제되지 않았던 때였다. 따라서 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시각을 글자(한자)가 아니라 12지신의 동물그림으로 표현했다. 자(子)·축(丑)·인(寅)·묘(卯) 대신 쥐와 소, 호랑이, 토끼 등의 동물 그림으로 시각을 표현했으니 삼척동자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하나 대로변에 설치함으로써 지나는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원래 ‘천문 기상’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천기(天機)’에 속했다. 왕(王)이라는 상형문자가 상징하듯 하늘(―)과 땅(ㅡ)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존재(ㅣ)가 바로 임금이었다. <서경> ‘요전편’은 ‘임금 만이 하늘 땅과 소통한 뒤에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나누어 주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관상수시(觀象授時·하늘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절기와 시간을 알림)’라 했다.
하지만 세종은 ‘천기’를 독점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누설’ 하고 말았다. 왜냐. 예부터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사기> ‘열전·역이기전’)고 했다. 세종은 바로 그 농사를 짓고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시간과 절기를 스스로 알고 대비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것이다. 세종은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하여 국가의 표준 시계로 삼은 다음 일과 시간에도 백성들이 쉽게 시간 및 절기를 알 수 있는 공중 해시계(앙부일구)를 발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천기누설’을 ‘천기공유’로 만든 이가 바로 세종이었던 것이다.
■앙부일구를 둥글게 만든 이유
그렇다면 왜 솥뚜껑을 뒤집어놓은 곡면 모양으로 앙부일구를 만들었을까. 사실 해시계는 세계의 어느 고대 문명 사회에서나 다양하게 제작됐다. 하지만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해가 뜨는 높이와 방향이 바뀐다. 따라서 평면으로 해시계를 만들면 해의 그림자가 달라지게 되고, 시계의 숫자판이 불규칙해지며 사이 간격도 일정치 않게 된다.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은 “세종 시대의 과학자들은 바로 이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숫자판을 오목하게 만든 앙부일구를 발명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앙부일구는 고유의 정밀 시계 발명품이자 독창적인 과학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앙부일구 등을 만든 과학자들은 이순지(?~1465), 장영실, 이천(1376~1451), 김조(?~1455) 등이다.
■서울의 위도에서 읽은 정확한 시간과 절기
이와 같은 세종의 가없는 애민정신을 오롯이 담은 공중해시계, 앙부일구 1점이 미국에서 환수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올 6월 미국의 한 경매에 출품된 앙부일구를 매입해 17일 오후 2시 공개한다고 밝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평소 해외 경매 사이트 등을 통해 국외 소재 문화재의 구입 환수를 타진하고 있다. 이번에 환수되는 앙부일구도 지난 1월 미국 경매에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곧바로 검증작업에 돌입했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장은 “해외반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골동품상에서 한 개인이 구입해 소장했던 것”이라며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여러차례 취소·연기되었다가 지난 6월 재개된 경매에서 낙찰받았다”고 전했다. 환수되는 앙부일구는 지름 24.1㎝, 높이 11.7㎝, 약 4.5㎏의 무게를 지닌 금속제 유물이다.
김상혁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장은 “이 앙부일구는 1713년(숙종 39년) 이후~19세기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그렇게 본 이유가 있다. 환수된 앙부일구에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한 값인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三十七道三十九分一十五秒)’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1713년(숙종 39년) 한양의 종로에서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37도 39분 15초의 값을 얻었다”는 <국조역상고>(1796년)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환수된 앙부일구는 서울의 위도에서 정확한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다. 현대 시각체계와 비교해도 거의 오차가 나지 않고 절기와 방위, 일몰시간, 방향 등을 알 수 있는 체계적이고 정밀한 과학기기라 할 수 있다.
■앙부일구는 오늘날의 만능시계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에 따르면 앙부일구는 오목한 구형 안쪽에 설치된 막대에 해 그림자가 생겼을 때 그 그림자의 위치로 시각을 측정하는 원리로 제작됐다. 해 그림자를 만드는 끝이 뾰족한 막대는 영침(影針)이다. 영침(시침)의 끝은 구의 중심이 되며, 막대의 축을 북극에 일치시켰다.
영침 둘레에는 시각을 가리키는 시각선이 세로로 그려져 있다. 세종 시대엔 그 시각을 12지(十二支)의 동물인형으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또 시각선과 직각으로 13개의 절기선을 새겨 넣었다. 이 절기선 양쪽 가장자리 윗면에 24절기가 표시되어 있다. 해는 여름이면 높이 뜨지만 겨울이 되면 비스듬히 떠서 방 안 깊숙이 비춘다. 당연히 그림자도 여름이면 짧아지고 겨울에는 길게 늘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이용한 것이 이 13줄이다. 그 중 가장 바깥 줄에는 시침의 그림자가 가장 길게 되는 곳에 ‘동지(冬至)’라는 표시가 있다. 제일 안쪽 줄은 시침의 그림자가 가장 짧게 되는 곳에 ‘하지(夏至)’라 써 있다.
나머지는 소한, 대한, 입춘, 우수로 이어지는 24절기를 나타낸 것이다. 즉 계절의 변화에 따른 24절기가 그 변화에 따라 해의 기울기가 달라져 시침의 그림자가 변하는 모습을 13줄로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앙부일구는 천구상에서 일정한 주기를 갖고 회전하는 태양의 운행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구였다. 따라서 해 그림자가 드리워진 절기선과 시각선의 눈금을 읽으면 별도의 계산 없이 그때의 시각과 절기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는 간편한 기구라 할 수 있다. 서울의 위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영침을 서울의 북극고도에 맞추어 설치했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을 기준으로 한 국가 표준시계이기 때문이다.
윤용현 과장은 “이렇듯 앙부일구는 영침의 해 그림자를 통하여 시간과 그 때의 절기를 한눈에 알 수 있게 설계했다”면서 “오늘날의 만능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에 환수된 앙부일구는 정밀한 주조 및 섬세한 은입사 기법, 다리의 용과 거북머리 등의 뛰어난 장식요소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고도로 숙련된 장인이 만든 예술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앙부일구는 궁궐과 관공서, 일반 사대부가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됐다. 하지만 세종 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앙부일구 7점은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또한 세종 애민정신의 상징인 ‘12지신 동물그림’이 새겨진 앙부일구도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19세기 후반이 되면 휴대용 앙부일구로 발전한다. 한성판윤을 지낸 강윤(1830~1898)과 동생 강건(1843~1909)이 1881년(고종 18년)이 만든 제작한 휴대용 앙부일구가 대표적이다. 이번에 돌아온 앙부일구는 18일부터 12월 2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과학문화실에서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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