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묽은 우유 / 김보라
[숨&결]
김보라 ㅣ 영화감독
#장면 1.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50대 비혼 여성 앤지의 일터로 옛 애인 사이먼이 찾아온다. 실력 없는 피아노 연주자에서 부동산 변호사가 된 그는 장성한 아이들 셋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앤지에게 몇 시에 일이 끝나는지 묻는다. 그녀는 거절의 의사를 바로 표한다. 그러자 그는 성매매를 했던 앤지의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와 옷을 벗었던 일을 말하며 앤지를 비열하게 모욕한다. 그가 떠난 뒤 앤지는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각한다. 그런 말을 꺼내 어떤 만족감을 느낄 인생은 ‘낙심한 인생’이라는 걸, 타인의 삶의 균열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들, 그런 식의 천박한 자양분은 ‘묽은 우유’와 같다고.
#장면 2.
수학 교사였던 70대 백인 여성 올리브는 유명 시인이 된 옛 제자 앤드리아 르리외를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다. 올리브는 그녀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고 그 일화를 마을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하며 말한다. “외로운 아이 같았어.” 마치, 아무리 앤드리아가 현재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더라도 그 애의 ‘진짜 모습’을 자신만은 안다는 태도로. 얼마 후 올리브는 집 우체통에 꽂힌 <미국 시 리뷰> 잡지를 발견한다. 그 잡지에는 제자가 자신에 관해 쓴 시가 실려 있다. “삼십사 년 전 내게 수학을 가르쳐준 누군가는/ 나를 겁에 질리게 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침 먹는 자리로 와서 앞에 앉았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채/ 내가 늘 외로움을 탔다고 말했다/ 그 말이 자기 이야기인 줄 모르고.”
이 두 장면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 <올리브 키터리지>와 <다시, 올리브>에서 소름 끼치게 좋았던 장면이다.
30대 중반의 나를 떠올린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했던 그 시기 내 삶의 어떤 사람을 답답해했던 과거의 나를. 삶에서 자주 ‘나쁜 선택’을 하는 그녀를 보며 ‘완전히 무너져 있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무너져 있던 것은 나였다. 누군가가 삶에서 흔들릴 때 곁에서 온기가 되지는 못할망정 감히 판단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 속에서 불안을 봤던 이유는 그때의 내가 몹시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슬픔을 탐색해서 내 행복과 옳음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스산한가. 그녀는 그저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알아가고 있었을 텐데. 우리는 자신의 품만큼 사람들을 바라본다.
마음이 건강하지 않을 때 문득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다. 내가 이상한 것 같아. 나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몰라. 누군가 뒤에서 내 험담을 하겠지. 그 두려움은 축축한 지하실의 곰팡이 같다. 감출수록 더 커지는 수치심이다. 그 곰팡이는 때로 우리가 사람들의 곰팡이를 더 킁킁대게 만든다. 하지만 어느 날 알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서 찾던 곰팡이는 내가 숨기고 있던 곰팡이였음을.
날마다 내 안의 두려움과 사랑을 맞닥뜨린다. 어느 날은 두려움이 어느 날은 사랑이 이긴다. 때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에 대해 판단분별을 실컷 하고 난 밤이면, 그 판단분별이 사실 자신을 향하고 있던 것이었음을 알아차린다. 오늘 나는 행복하지 않았구나, 하고. 그때 가만히 그림자들을 들여다본다. 외로움, 비열함, 옹졸함, 수치심, 두려움.
올해는 안다고 착각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던 해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니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고 나니 해방감이 찾아왔다. 옳고 그른 것을 나누기란 어렵고 어제까지 안 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경험하는 것, 그것은 ‘진짜’를 찾아가는 고된 여정에 찾아오는 은총이다. 그 은총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재단하는 ‘묽은 우유’에 점차 덜 기대게 될 힘을 얻게 된다. 곰팡이들을 햇볕에 내놓을 때마다 삶은 비로소 총천연색으로 다가오며 말한다. 어제는 이미 죽었다. 당신도 내가 그러하듯 ‘나다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임을. 나는,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상하고 아름답고 천박하고 고귀한 그 모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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