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관념'은 2020년에도 살아있다[플랫]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 들끓은 젠더 이슈의 중심에는 법원의 성범죄 재판이 있습니다. ‘미투 운동’과 ‘n번방 사건’ 등을 겪으며 성범죄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성범죄가 양산된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죠. 아예 법을 뜯어고쳐야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이런 지적에 공감하는 판사들이 시민들과 함께 성범죄 재판의 현실을 짚어보고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법원 안에서 구성된 젠더법연구회 재판다시돌아보기팀이 지난 9월 열었던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포럼(팀장 유성희 판사, 포럼 총괄 유현영 판사)입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판사·변호사·검사·법학전문대학원 대학원생·활동가·교수 등 200여명이 온라인 화상대화 프로그램 줌(Zoom)으로 참여했습니다. 법 이야기는 어렵지만 필요합니다. 포럼 내용을 정리해 두 번에 나눠 전합니다.
첫 번째 주제는 ‘성적 자기결정권’입니다.

‘여성이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한다.’ 이 ‘정조관념’은 오늘날 과연 사라졌을까요?
국가가 범죄를 규정하고 처벌할 때 보호하고자 하는 이익이나 가치를 ‘보호법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죄의 보호법익은 생명, 폭행죄의 보호법익은 신체, 명예훼손죄의 보호법익은 명예입니다.
성범죄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권’이라고 하지만 ‘자기결정권’이라는 표현에서부터 앞서 언급한 범죄들의 보호법익과는 결이 다릅니다. 더 큰 차이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이지요.
조정민 판사와 박수현 판사는 이번 포럼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을 해체해 다시 정의했습니다. 정조관념에 기반해 있는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의 해석과 적용 방식이 성범죄 재판에서 이른바 ‘피해자다움’의 추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해자 처벌의 범위를 축소한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피해자의 속성’보다 ‘범죄 성립 요건’을 중심으로 성범죄 사건을 심리해야 한다는 두 판사의 제안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법조계의 근본적인 시각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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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할 ‘가치’가 있는
피해자를 선별하는 ‘정조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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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죄를 규정하는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돼있습니다.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폭행 또는 협박’이 발생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이죠. 이 조문엔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무엇인지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법에는 없지만, 판결을 보면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판사들은 보호법익을 범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거나 범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활용합니다. 양형 결정에도 반영하죠. 하지만 법에 보호법익의 개념이 명확히 쓰여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상황에 따라 편견이 개입될 여지도 생깁니다.
성범죄법이 정조관념에 기반한 점은 여러 군데서 드러납니다. 애초에 성범죄를 규정하는 형법 32장의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였지요.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뀐 것은 1995년입니다. 당시 법무부는 개정 제안 이유서에서 “정조에 관한 죄란 성적 순결을 보호하기 위한 범죄라는 인상을 주어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보호하는 범죄의 명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인정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강간죄’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강간은 강제하는(혹은 억지로 시키는) 간음을 뜻합니다. ‘간음’의 사전적 의미는 ‘부부 아닌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음’이지요. 결국 배우자가 아닌 사람에 의한 성관계를 강요하는 것을 범죄로 본다는 뜻입니다. 조 판사와 박 판사는 “정조의 개념은 현재 또는 장래의 배우자인 남성과만 성관계를 하는 것을 ‘순결’하다고 하고, 현재 또는 장래의 배우자인 남성 이외의 자와의 성관계를 금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성범죄 피해자를 ‘선별’하는 과정이 작동하는 것이지요. 정조관념 체계에서는 혼인 외 성관계를 한 사람 중 ‘강간죄의 피해자’와 ‘정조 의무를 위반한 사람’을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후자는 소위 ‘음란한 여성’, ‘불륜’, ‘꽃뱀’ 등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성범죄를 제외한 다른 범죄에서는 피해자 유형론이나 정형화된 피해자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판사들의 분석입니다.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정조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보더라도 이런 구조는 동일합니다. 범죄가 성립한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피해자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피해자 속성’에 부합한다고 판단돼야 범죄를 인정하는 거꾸로 된 구조인 것이지요. 그렇게 ‘보호 가치 있는 피해자’를 선별하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실상 정조 의무를 어긴 사람과 같이 피해자에서 배제됩니다.
이 때문에 재판의 초점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옮겨지고, 때로는 주객이 전도돼 가해자 행위에 대한 공방만큼이나 피해자다움에 대한 공방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 피고인들의 대표적인 무죄 주장입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도식이 생깁니다.
“피해자는 ○○한 사람(연령, 학력, 경력, 지능, 환경)으로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피해자는 당시 ○○했다(가만히 있었다,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우호적인 행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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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피해자가 동의한 것으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거나, 동의는 아니더라도 위와 같이 행동한 점에 비추어 폭행, 협박, 위계, 위력에 이르지 못했거나, 적어도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다고 피고인이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어 피고인에게 범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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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속성이 아니라
범죄 성립 요건을 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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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자기결정권이 판결에 등장한 과정을 살펴보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분명해집니다. 조 판사와 박 판사는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이 판결에서조차 불명확한 상태였고, 현재 대법원의 개념 정의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합니다. 당장 성적 자기결정권이 헌법재판소 결정에 처음 나온 것은 성범죄의 보호법익이 아니라, 간통죄와 혼인빙자간음죄가 제한하는 기본권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인격권·행복추구권에는 개인의 자기운명결정권이 전제되는 것이고, 이 자기운명결정권에는 성행위 여부 및 그 상대방을 결정할 수 있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또한 포함돼 있으므로 간통죄의 규정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1990년 헌재 결정문)
헌재 결정문에 나오는 성적 자기결정권은 간통죄가 위헌이라고 선언하면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성적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가급적 자제돼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성범죄의 보호법익과는 개념이 다른 것이죠. 헌재는 이후 성범죄 사건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단어를 쓰긴 했지만 개념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법원이 성범죄 보호법익의 개념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2000년입니다.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았지요. 준강간죄 사건이었습니다.
“형법 제299조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를 같은 법 제297조, 제298조와 강간 또는 강제추행의 죄와 같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바, 이 죄가 정신적 또는 신체적 사정으로 인하여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해 주는 것을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다.”(2000년 대법원 판결문)
그 후 대법원과 1심, 2심 판결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이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 적은 없었습니다. 2019년에서야 대법원은 판결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을 적시합니다. 그전까지는 판사들 사이에서도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일치된 개념 정의가 없었던 셈이지요.
“형법은 제2편 제32장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장에 규정된 죄는 모두 개인의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여기에서 ‘성적 자유’는 적극적으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행위를 할 것인가 여부, 성행위를 할 때 그 상대방을 누구로 할 것인가 여부, 성행위의 방법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2019년 대법원 판결문)
그렇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대법원의 개념 정의는 적절한 것일까요? 조 판사와 박 판사는 이런 방식의 정의에서는 “포괄할 수 있는 (성범죄의) 범위가 좁아지는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성행위가 성교를 의미할 경우 강간죄 외에 강제추행죄 같은 범죄를 포괄할 수 없고, 특히 ‘n번방’ 사건과 같은 신종 성범죄의 해석에는 도움이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두 판사는 “디지털 성범죄 등 신종 성범죄는 직접적인 유형력의 행사나 피해자에 대한 물리적인 행위를 전제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대법원의 개념 정의는) 유형력 행사에 해당하는 행위를 중심으로 한 해석이므로 물리적인 접촉이 포함돼 있지 않은 성범죄 유형을 포괄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판사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의를 제안했습니다.
“피해자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 등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독자적으로 성적 관념을 확립하여 자기의 성적인 정체성과 자아상을 결정하고 유지할 권리.”
나아가 법원이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는지’가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심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법에 정해진 범죄 성립 요건에 충실한 판단이라는 취지입니다. “어떠한 범죄도 피해자의 요건을 정하고 있지 않다. 범죄 성립의 구성요건을 정하고 있을 뿐”이라는 게 두 판사의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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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도 논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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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에 토론자로 참여한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그동안) 여성이 국가형벌권에 따른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정조라는 사회적 질서를 위반하지 않아야 하는 불평등한 의무를 부담하게 돼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보호법익 하에서의 (범죄 성립) 구성요건에 대한 평가를 피해자의 저항행위(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피고인의 폭행과 협박 행위에 대한 판단으로 옮기는 게 필요합니다.”
국회에선 형법 조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논의도 진행 중입니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비동의 강간죄 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배복주 정의당 여성본부장은 “강간죄의 기본적인 구성요소가 폭행·협박에 의한 간음행위로 돼있다는 점은 피해자의 저항을 전제로 한다”며 “가해자의 유형력에 대한 저항 여부에 따라 피해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이 부분이 처벌 공백을 발생시킨다”고 했습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66개 상담소의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전체 상담사례 중 폭행·협박이 없었던 경우가 71.4%나 됩니다.
이번 포럼에서는 성범죄의 보호법익을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성’ 자체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살인죄의 보호법익을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로 보듯이, 성범죄의 보호법익도 ‘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생명이나 신체, 명예, 그리고 재산 기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면 그 권리의 내용 안에는 당연히 그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있다. 굳이 ‘자기결정권’을 구분해내서 달리 취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임수희 판사의 말입니다. 임 판사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행사됐다’고 평가되는 순간, 피고인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손상된 성이 있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 여부와 상관없이 처벌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고인은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하지요. 반면, 피해자는 스스로를 무력하고 자율성이 없는 사람으로 비하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고 항변해야 합니다. 이런 재판 현실이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보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임 판사는 “길은 열렸다”고 말합니다. 지난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아동·청소년에 대한 위계 간음죄에서 위계의 의미를 확장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민유숙 대법관과 노정희 대법관은 보충의견에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16세 미만자의 성행위는 형식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를 존중한다는 측면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보호돼야 할 성이 침해됐는지 여부의 측면으로 접근하는 게 타당하다.”
미성년자 사건이기는 하지만 ‘보호돼야 할 성’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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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 기자 lhr@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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