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알레르기면 어때?..슬픈 껍데기에 갇혀 살 순 없잖아"

박동해 기자 2020. 11. 1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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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 살기엔 젊고 예쁜 하루하루가 아깝잖아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혼자 양평 여행을 떠난 지난 4월, 모자를 썼음에도 햇빛을 받으며 걸으니 얼굴과 목 부위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이고은씨 제공) © 뉴스1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햇빛 알레르기를 빼고서 내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햇빛 알레르기를 빼고서 아무 이야기를 할 수 없다면, 그건 슬픈 껍데기의 삶이다."

고은씨는 만 열넷,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햇빛 알레르기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건 '알게 됐다'는 표현보다 '느끼게 됐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푸르던 2005년의 5월 엄마 손에 이끌려 동네 뒷산으로 억지 등산을 하고 온 날 어깨, 손등에 물집이 잡혔다.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고 고은씨는 알레르기의 원인이 햇빛임을 깨달았다.

그 이후 햇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는 삶의 경계선이 됐다. 그늘의 보호를 받는 영역을 벗어나면 곧 고통이 찾아왔다. 햇빛 알레르기를 앓으며 사람들과 관계도 멀리했다. 울적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고은씨는 성장하며 햇빛을 피해 더는 구렁텅이로 숨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알레르기와 평생을 동반자로 살아가야 한다면 '악으로 깡으로 햇빛을 겁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피부가 타들어 갈 고통이 예상돼도 나가 놀고 싶을 땐 창을 열고 나갔다. 피부에는 물집이 부풀었지만 동시에 마음속에 자신감도 커졌다. 햇빛 알레르기라는 껍데기 안에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슬프게 살기엔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쉬웠다.

지난 11일 햇빛이 사라진 오후 7시쯤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서툰 초보 작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이고은씨(29)를 만났다. 고은씨는 최근 자신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15년간 햇빛 알레르기를 앓아온 경험을 풀어낸 첫 책 '햇빛 알레르기면 어때?'를 펴냈다. 그는 이번 책이 '서글픈 투병일지'가 아닌 '발칙한 일대기'라고 소개했다.

"고통에 대한 표현을 강조하는 대신 그걸 받아들이고 삶을 즐기겠다는데 포커스를 맞췄어요.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기도 하고요."

그의 말처럼 책은 많은 부분이 '나가 노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햇빛 알레르기가 몸을 아프게 할지라도 소풍을 하고, 여행을 하고, 수영을 하고, 운전을 하고, 연애도 했다. 고은씨는 영원불멸하고 절대적인 태양과 싸움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원래 긍정적인 성격과 함께 '아쉬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나의 젊음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학교 때 친구들과 여행도 못 가고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이 내가 가장 젊고 예쁠 때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아파도 예쁜 모습으로 사진이라도 남기자는 생각에 밖으로 나갔어요. 그래도 지나고 나면 아팠던 기억보다 즐거운 기억이 더 많이 남은 것 같아요."

밖으로 나는 게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햇빛 알레르기는 일종의 면역 질환이다. 면역 세포들이 햇빛에 변성된 피부 단백질을 항원으로 인식해 공격을 해 물집과 두드러기가 생기고 백혈구가 '열일'을 하다 보니 알레르기가 난 뒤에는 피곤이 몰려왔다. 맑은 날에는 15분에서 20분만 밖에 나가 있어도 증상이 생겼다.

해(日)를 피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상'(日常)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갈 때도 동서남북 방위를 계산해 햇빛이 덜 드는 쪽에 앉아야 했다. '날씨가 좋다'는 말도 고은씨에게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 그에게는 해가 없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 '나가 놀기 좋은 날'이다.

온종일 떠있는 햇볕을 받으며 활동하는 타인들의 일상이 고은씨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 그는 자신이 유언을 남긴다면 "햇빛이 짱짱한 곳에 묻어주었으면 좋겠어"라는 바람을 전하고 싶었다고 썼다. 이렇듯 고은씨는 15년 동안 몸과 마음의 통증이 통상이 되는 생을 살아왔다. 가끔씩은 두려움이 몰려와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도 있었다.

이고은씨가 자신의 책 '햇빛 알레르기면 어때?' 중 유언에 대한 생각을 적은 부분. 고은씨는 "햇빛이 짱짱한 곳이 묻어주었으면 좋겠어"라는 유언을 남기고 싶다고 썼다. © 뉴스1

하지만 고은씨는 밖으로 나가는 것,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아갈 수록 사람들을 만날 수록 그는 자신이 더 긍정적이고 '단단한' 사람이 되가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병을 알리고 사람들과의 경험을 나눌 때 몸이 더 가벼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 쓰면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책을 준비하며 초기에 썼던 원고에는 병 때문에 갖게 된 분노와 병의 고통을 표현하는 문구가 많았다. 그런데 고은씨는 책을 쓰며 스스로를 들여다보니 햇빛 알레르기라는 껍데기 속에 '병이 있더라도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햇빛 알레르기를 앓던 모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 알려지면서 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대해 이 고은씨는 사람들이 햇빛 알레르기 환자들을 '슬픈 사람들'이라고만 인식하는 것이 걱정된다고 털어놨다.

논란이 된 죽음에 대해 그는 "그분이 햇빛 알레르기를 앓고 있던 것은 맞지만 그 삶의 끝이 이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죠"라고 말을 아꼈다.

사실 햇빛 알레르기 환자는 환자마다 증상의 종류나 정도가 다르다. 이 때문에 고은씨는 '햇빛 알레르기지만 잘살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자신도 고통과 우울한 감정을 이겨내기 힘들 때가 많았는데 어디선가 다른 환자들은 자신보다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은씨는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다음 책으로 햇빛 알레르기 증상을 겪는 환자들을 만나 인터뷰집을 엮어볼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른 분들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신지 안부를 묻고 싶어요"고 말했다.

potgu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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