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세력 게릴라전에 당하는 선진국 전력.. '첨단무기의 역설' [디펜스 포커스]

박수찬 2020. 11. 1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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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 화력·고도 전투기술 갖춘 美
이라크·아프간·소말리아 등지서
값싼 소총 지닌 '전사'들에 곤욕
현지 지형 잘 알고 전투 의지 높아
군 감축·과학화 장비 서두르는 韓
전력화 10년 소요.. 만능주의 경계
새 전쟁 양상 유연하게 대처해야
이라크전쟁이 한창이던 2003년 3월23일 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부의 공화국수비대를 소탕하고자 미 육군 AH-64 ‘아파치’ 공격헬기 32대가 은밀히 이륙했다. 에이태킴스(ATACMS) 미사일로 내륙지역을 초토화한 상황에서 AH-64의 앞길을 가로막을 적군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지상에서 수천발의 총탄이 AH-64 동체를 강타했다. 이라크군이 AK-47소총으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AH-64 32대 중 31대가 손상을 입었다. 1대는 추락해 조종사 2명이 포로가 됐다. 대당 1450만달러(약 161억원)짜리 최첨단 장비가 100달러(11만원)짜리 구식 무기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우리가 아는 전쟁은 없다”

전쟁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 6·25전쟁처럼 전차·장갑차 수천대와 병력 수만명이 뒤얽혀 혈투를 벌이던 시절은 지났다. 정밀유도무기를 사용해 적군의 핵심 시설을 무력화하는 전략도 과거의 방식으로 전락하는 모양새다. 수십년 전에 제작된 낡은 소총을 든 무장세력에게 최첨단 장비를 갖춘 선진국 군대가 패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수한 무기를 갖춘 군대가 승리한다’는 기존 인식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셈이다.

2003년 이라크전쟁 당시 단기간에 수백㎞를 주파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미군은 무장세력들을 신속하게 제압하고 치안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군의 기대는 오래지 않아 깨졌다. 이라크 주요 도시에 숨어있던 무장세력들은 싸구려 폭탄과 AK-47로 미군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미군은 병력 증파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40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미군은 2011년 이라크에서 철수하고 만다. 수천억달러를 들여 우주무기까지 확보한 세계 최강 미국의 굴욕적인 철군이었다.
값싼 소총을 지닌 현지 게릴라를 첨단 무기로 무장한 선진국 군대가 이기지 못하는 양상은 냉전을 전후로 세계 각지에서 반복되고 있다. 영화 ‘블랙호크 다운’의 실제 사례였던 모가디슈 전투에서 미군 특수부대가 소말리아 반군에게 곤욕을 치렀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첨단무기의 역설’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압도적인 화력과 고도의 전투기술을 갖춘 미군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군과 유사한 첨단장비를 도입하는 데 소요되는 막대한 예산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군을 상대하는 국가나 무장세력들이 전면전 대신 게릴라전에 몰두하는 이유다.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서 이슬람 무장세력이 입증한 것처럼 현지 지형을 잘 알고, 전투 의지와 인내력이 높은 전사들만 확보하면 얼마든지 미군을 상대할 수 있다. “초강력 무기를 가진 군사대국도 굳은 ‘의지’를 지닌 전사 한 명을 당해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분쟁지역에서는 닭 한 마리 값보다 저렴하며 수개월 이상 정비하지 않아도 사격이 가능한 AK-47 소총은 게릴라전을 더욱 부추긴다. 최대 1억정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AK-47 소총은 분당 600발에 달하는 화력을 지녀 세계 주요 분쟁지역에서 널리 쓰인다.
인천 옹진군 대연평도에서 해병대 장병들이 해안철책을 점검하고 있다. 뉴스1
◆한국도 예외 아냐… “첨단무기 만능주의 경계해야”

인구절벽에 따른 병력 감소로 발생할 전력공백을 메우기 위해 첨단 기술 도입을 서두르는 한국군도 예외는 아니다.

국방개혁 2.0에 따르면, 군은 병력을 50만명까지 감축하는 대신 드론봇(드론+로봇)과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비롯한 첨단장비를 지속 도입할 방침이다.

하지만 최근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북한 주민 월남 사건처럼 휴전선 일대 경계가 계속 뚫리면서 첨단 장비가 병력을 100% 대체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지 지형에 익숙하고 의지와 인내력을 갖춘 북한 주민이나 탈북민이 휴전선을 넘나들지만, 수천억원을 들여 만든 군 과학화 경계시스템은 이를 포착하지 못했다. 미국이 중동에서 겪었던 것과 유사한 군사적 실패가 한반도에서 벌어진 셈이다. 중동과 다른 점은 이슬람 무장세력과 달리 AK-47 소총을 우리 군인들을 향해 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병력 감축 기조를 재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육군 드론봇전투단이 드론을 조종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뉴시스
지난 9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지적됐다.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은 강원도 고성 북한 주민 월남과 관련해 “경계 실패라기보다는 과학화 장비의 한계”라며 “군인 숫자는 줄이고 과학화 장비로 경계한다고 하지만 산림이 우거진 산악 지역에 출동 병력은 가까이 없으니 결국 생포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도 “미상 인원이 발견되면 병력이 핵심이 되고 장비는 보조수단으로 써야 작전이 성공한다”고 말했다. 여야 의원들의 잇따른 질타에 서욱 국방부 장관은 “병력 중심 경계체계에서 과학화 중심으로 바꾸면서 철책에 (병력이) 소수가 있다”며 미흡한 점은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일각에서는 군의 전반적인 무기 도입 및 병력 확보·운용 방식 등도 시대 변화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요 제기부터 전력화에 이르기까지 최대 10년 안팎의 시간이 소요된다. 반면 전쟁 양상의 변화는 빠르게 이뤄진다. 막대한 혈세를 들여 확보한 무기가 정작 일선에서는 뒤떨어진 장비로 전락하는 이유다. 실제로 이라크전쟁에서 AK-47 소총에 취약한 공격헬기의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군은 여전히 수조원을 들여 소형무장헬기(LAH), 상륙공격헬기, 대형공격헬기 2차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반도 유사시 북한 안정화 작전 과정에서 이라크전쟁의 전례가 반복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예비역 장성은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총을 든 적군을 몰아낸다는 전쟁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며 “기술에만 의존하지 말고 전쟁의 새로운 양상을 주시하면서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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