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두를 걸고 '사서 고생'

탁재형 2020. 11. 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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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13m에 폭 3.9m, 무게는 9t. 20m쯤 되는 마스트(돛대) 끝까지 앵글에 욱여넣으려다 보니 사진 속의 배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파도를 미리 만나기라도 한 듯 기울게 찍히고 말았다.

이 배(사진)가 한국 최초로 단독 무보급 무기항 세계일주 항해에 나서기 이틀 전이다.

배의 이름은 '아라파니'.

기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배가 항구를 나서는 순간부터 '동이면 동, 서라면 서'로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항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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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 제공

길이 13m에 폭 3.9m, 무게는 9t. 20m쯤 되는 마스트(돛대) 끝까지 앵글에 욱여넣으려다 보니 사진 속의 배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파도를 미리 만나기라도 한 듯 기울게 찍히고 말았다. 촬영 날짜는 2014년 10월17일. 이 배(사진)가 한국 최초로 단독 무보급 무기항 세계일주 항해에 나서기 이틀 전이다. 배의 이름은 ‘아라파니’. 순우리말로 ‘바다 달팽이’라는 뜻이다.

세계일주 항해라고 하면 오늘은 이 나라, 내일은 저 나라를 마음대로 주유하는 여유롭고 낭만적인 모습을 그려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별이 가득한 밤바다를 바라보며 와인잔을 기울이고, 도중에 기착한 어느 남국의 섬에선 해변 야자수에 해먹을 걸어놓고 한가로이 햇살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그것은 ‘무보급, 무기항’이 아닐 경우의 이야기다. 기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배가 항구를 나서는 순간부터 ‘동이면 동, 서라면 서’로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항해해야 한다. 4만㎞ 이상의 바닷길을 주파해야 하고, 적도를 두 번 지나쳐 출발한 바로 그 항구로 돌아와야 한다. 게다가 단독이다. 반년이 넘는 기간 오로지 바닷새와 물고기만을 말벗 삼아 고독과 그리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사서 고생’이라는 표현 말고는 합당한 수식어가 드문 이 도전에 나선 이는 김승진 선장(출항 당시 52세)이다. 그는 바다에 나서기 한참 전부터도 인생사의 격한 파도 위에 있었던 사람이다. 한국에 있을 때엔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PD였고, 뉴질랜드로 이주한 뒤에는 사업가로 변신해 돈도 원 없이 벌어봤다. 하지만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먼지처럼 사라져갈 때, 그는 남은 돈 3억원을 들고 크로아티아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재기를 위한 기발한 아이템을 찾아내 마지막 종잣돈으로 사업을 멋지게 성공시켰다면 자기계발서에 등장하는 비즈니스맨들의 귀감이 되었겠으나, 지중해를 찾은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요트의 마스트들이 베네치아 해군 병사들의 창검처럼 빼곡히 도열한 두브로브니크에서, 그는 ‘김 PD’가 아닌 ‘김 선장’으로 변신했다. 이때 구입한 배가 바로 ‘아라파니’호다.

마지막 종잣돈 털어 단독 세계일주 항해

이 배를 한국까지 몰고 오기 위한 항해로 시작해, 그는 바다와 친하게 지내고, 때로는 맞서고, 마침내 품에 안기는 법을 배웠다. 스치기만 해도 침몰되는 거대한 유빙을 피해서 배를 모는 방법, 중국제 소총을 난사하며 달려오는 믈라카(말라카) 해협의 해적들로부터 자취를 숨기는 방법을 연마했다. 그 기간에 아라파니는 그의 집이자 신체의 연장이었다. 단독 세계일주 항해는 바다에서의 삶이 지속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그 문을 돌파하는 데서, 김 선장에게 필요한 유일한 친구가 아라파니였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209일 후, 아라파니는 김 선장을 태우고 출발했던 바로 그 장소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바다 위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아라파니보다 딱 1m 더 긴, 더 새롭고 더 튼튼한 새 요트와 함께.

혹자는 ‘요트’라는 말만 들어도 ‘호화’와 ‘사치’를 연상하며 경기를 일으킬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해보고 싶은 목표이거나, 생의 마지막을 의탁해보고 싶은 라이프스타일이기도 하다. 설령 코로나19가 발목을 잡고, 공무원 부인이 말린다 해도 말이다.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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