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세계챔프 김철호와 오산복싱협회 정동호회장
김철호의 고향 오산에서 만난 복싱인 정동호 회장
정 회장, 제 2의 김철호 양성 목표..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필자가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올해로 21번째 가을을 맞이 했건만 코로나 광풍의 위력 때문에 올 가을처럼 을씨년스런 분위기는 사상 처음이다.
을씨년 이란 말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찬탈당한 1905년(을사년)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온 나라가 침통한 분위기에 젖어 그날 이후로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을사년스럽다' 는 말이 자연스럽게 파생되었다.
복싱계도 얼마 전 타계한 심영자 회장님의 추모 분위기와 겹쳐 한층 우울한 분위기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23일 심영자 회장 영결식에서 심영자 회장의 첫 작품이라 할수 있는 전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김철호를 만난 필자는 만감이 교차했다
김철호가 1979년 1월 처음 워커힐 APT에 입성한 것은 동갑내기 천재복서 양일 때문이었다. 마치 1991년 프로야구 쌍방울이 출범할 때 전주고 특급투수 김원형의 등에 업혀 입단한 포수 박경완의 처지와 흡사했다. 그때 만일 김원형이 고려대를 선택했다면 박경완에겐 프로 입단은 언감생신이였듯 양일이 워커힐 입촌을 거부했다면 김철호의 입성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81년 1월 김철호가 세계정상에 오르며 포효했고, 박경완은 새천년에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 4연타석 홈런을 포함해 40홈런을 기록했으며 시즌 MVP에 등극해 성공 신화를 창출했다. 이후 두 선수 모두 스타덤에 올랐다.

김철호, 그는 내가 1983년 10월 20일 88 프로모션에 입성했을 때 나의 트레이너였고, 1989년 4월 19일 트레이너로 역시 88 프로모션에 입사했을 땐 나의 직장 상사였다, 특히 프로에 입문 할 때는 김철호가 챔피언 시절 친히 입던 '칠성사이다' 로고가 선명한 트렁크를 입고 출전했지만 형편없는 실력 때문에 불과 2년 2개월 만에 복싱을 접었던, 그와의 암울했던 지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1961년 3월 3일 경기도 오산 출신의 김철호는 1981년 1월 26일 베네주엘라에서 챔피언 오로노에 9회 KO승을 따내며 만 19세에 '소년 급제'에 성공해 신데렐라로 급부상한 복서다. 그는 국내에서 배출한 43명의 챔피언 중 챔피언 등극 후 가장 기량이 급성장한 복서로 첫 손에 꼽힌다. 1차 방어전에서 맞대결한 당시 10전 전승(7KO승)의 와다나베 지로는 일본이 배출한 챔피언 중 80년대를 대표하는 복서 반열에 오른 명복서이다.
60년대 파이팅 하라다, 70년대 구시껜 요꼬와 함께 그가 2차 방어전에서 상대한 윌리 젠센 역시 세계 챔피언 출신 구티 에스파다스와 라파엘 오로노와 무승부를 기록한, 정교한 테크닉을 보유한 탑복서지만 김철호의 폭풍우 몰아치는 듯한 세찬 복부공격으로 13회에 백기를 들었다. 4차 방어전에서 맞대결한 이시이 고키는 1977년 아시아선수권대회(요코하마)에서 한국의 박인태(동아대)를 꺾고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8년 세계선수권 동메달에 이어 그해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오인석(한국체대)을 꺾고, 북한의 김영철에게 승리해 역시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로써 이시히 고키는 남북한의 국가대표를 모두 제압한 유일한 일본 복서로 위세를 떨쳤다.
1979년 프로로 전향해 9전 전승 (5KO승)을 거둔 만만치 않은 도전자, 이시이 고키를 맞이한 김철호가 칼날처럼 예리한 좌우연타로 상대를 8회 47초만에 KO로 제압한 장면은 압권이었다. 김철호는 젠센 , 마루야마, 이시이 고키를 상대로 3연속 KO방어에 성공했는데 당시 트레이너가 홍수환이었다. 이런 화려한 이력을 지닌 세계 챔프 김철호가 챔피언이 되는 과정에서 심한 굴곡과 부침(浮沈)을 겪었다.
1978년 신인왕 출신의 김철호는 이듬해 4월 송재영과 8회전 경기에서 턱뼈가 깨지는 고통 속에 판정승을 거뒀고 그해 11월 김영환과 경기에서 한차례 다운을 당한 끝에 판정패를, 이어진 1980년 2월 벌어진 하경주와의 경기에서 2회 결정타를 맞고 다운을 당한 후 KO패 직전에 가까스로 기사회생하며 사실상 패한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후 전열을 정비해 11개월 후 적지에서 대관식(戴冠式)을 치뤘기에 더욱더 값어치가 묻어난 타이틀이었다.
이런 역경을 극복하고 정상에 등극한 김철호의 사례를 보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삶과 맞서 싸울 때 기적이 찾아 온다는 점과 포기하려거든 차라리 실패하자 그리고 모든 성공은 꿈으로부터 시작되고 정상에 올라서려거든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자라는 값진 교훈을 얻는다.

그런 그가 나고 자란 경기도 오산시로 지난 주말 필자는 발걸음을 돌렸다. 오산으로 취재를 떠난 이유는 얼마 전 오산복싱협회 초대회장에 선임된 복싱후배 정동호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
정동호 회장은 복싱 볼모지 오산에서 제2의 김철호 탄생을 위해 오산 지역 복싱 발전과 우수선수 양성 및 생활체육 활성화 등을 적극 도모하고 있는 복싱인이다. 1988년 학창시절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이경복 관장이 운영하는 송탄체육관에서 복싱을 수학한 정동호는 묵직한 파워와 강한 근성으로 무장한 복서였다.
전국 신인선수권대회 라이트웰터급에서 4전 전KO승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이후 이경복 관장 휘하에서 배출한 세계랭커 전태식, 동양 챔피언 박경현의 뒤를 이을 차세대 유망주로 견고하게 자리를 구축하며 안양시청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복서 정동호는 태권도 2단, 격투기 5단, 무에타이 6단, 킥복싱 9단의 종합격투기 유단자로 21전 17승(12KO승) 4패를 기록한 재목이었다. 하지만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며 방향을 튼 그는 해병대에 입대해 군복무를 해결 한 후 사업을 병행하면서 1999년 오산에 복싱 체육관을 열었고 2013년에는 사업이 번창하자 기존에 운영하는 체육관을 접고 사업에서 창출한 수익으로 건물을 매입해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복싱체육관 관장과 더불어 심판위원을 겸직한 사업가로 전형적인 유틸리티(Utility) 복싱인이다. 전국에 복싱체육관이 3천 개에 이를 정도로 포화 상태에 있지만 정동호 회장처럼 월세 부담 없는 본인 건물에서 운영되는 체육관은 예산에 박봉관, 전주에 박태림, 대구에 정영수, 속초에 진장수, 관장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선박 왕 오나시스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마치 물위에 뜬 기름처럼 세상 사람들의 생각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듯이 정동호는 부동산 등 다양한 업계에 진출해 종잣돈을 만든 후 본격적으로 복싱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정동호 회장 주변에는 든든한 조력자 두분이 포진되어 있다. 오산시 체육회 한종우 사무국장과 오산시 장인수 시의장이 주인공이다. 이충희, 임정면, 황유하, 진효준, 이동균, 이민현과 한 축을 담당하며 80년을 전후해 한시대를 풍미한 '고려대 농구팀'의 일원이였던 교사 출신의 한종우 사무국장을 보자 박수교, 김현준, 조동우, 박종천, 안종관, 유재학이 포진된 연세대와의 연고전 농구 경기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해박한 이론을 겸비한 전문 스포츠맨 출신답게 폭넓은 식견에 필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장군멍군'하며 대화를 주고 받았다.
용인대 체육학과 출신의 오산시의회 장인수 의장은 전직 복서 출신이다. 그는 필자에게 포천시장, 거제시장도 본인과 같은 복서출신이라고 역설하면서 본인도 오산 복싱 발전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일조하겠다고 말한다.

논어에 삼인행 필유아사(三仁行 必有我師)란 격언이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한 사람은 내 스승이다란 말이다. 바꿔 이야기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쪼록 정동호 회장을 위시해 한종우 사무국장, 장인수 시의장 등 세 분 체육인의 활발한 행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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