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시인이 말한 '홍주를 마실 자격'

정명조 2020. 11. 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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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을 가락으로 풀어내는 사람들..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진도 홍주 이야기

지난 7월 3박 4일, 10월 2박 3일로 보배 섬 진도(珍島)에 갔다. 그 이야기를 기사 세 편에 나누어 풀어보려고 한다. <기자말>

[정명조 기자]

[이전 기사 : 5대에 걸쳐 화가가 나온 진도 운림산방 이야기]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었다. 그의 형 임해군은 역모 사건에 휘말렸고, 진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 임해군의 아내가 조카인 허대를 불렀다. 유배지에 같이 가서 고모부를 잘 보살피라고 부탁했다. 허대는 술 좋아하는 임해군을 위해 소줏고리를 챙겼다.

임해군을 수행하기 위해 허대는 진도에 미리 내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유배지가 강화도로 바뀌었다. 허대는 그대로 진도에 눌러앉았다. 양천 허씨가 진도에 예술의 씨앗을 뿌리는 순간이다. 소치 허련과 의재 허백련이 그의 후손이다.

한편, 허대는 소줏고리로 술을 내렸다. 진도에서 많이 나는 지초 뿌리에 소주를 통과시키니 붉은빛을 띠었다.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았다. 진도의 전통 술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홍주다. 그 유래를 다룬 이야기 중 하나다.
 
▲ 세방낙조  진도 서남쪽 지산면 가학리 세방마을에서 보는 해넘이다. ‘한반도 최서남단의 가장 전망 좋은 곳’이다.
ⓒ 정명조
 
▲ 급치산 전망대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가다 급치산에 오르면 진도 최고의 전망대가 있다. 멀리 가사도와 손가락섬과 발가락섬이 보인다.
ⓒ 정명조
 
▲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급치산 전망대에 서면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조도 지구에 딸린 섬들을 볼 수 있다.
ⓒ 정명조
 
▲ 동석산  급치산 전망대 가는 길에 섬 산행으로 으뜸인 동석산이 보인다. 해발 219m지만 산꾼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 정명조
세방낙조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낙조와 어우러진 시닉드라이브 도로'를 따라가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한반도 최서남단의 가장 전망 좋은 곳'이 있다. 세방낙조다. 진도 서남쪽 지산면 가학리 세방마을에서 보는 해넘이다. 운이 좋으면, 홍주처럼 붉은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해넘이가 다가오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해는 바다로 떨어지고, 바다에는 등댓불이 켜진다. 사람들은 아쉬워 떠나지 않고, 홍주로 노을주를 만들어 마신다. 그들 틈에 끼어 이야기꽃을 피운다. 세월이 흘러도 바다가 두렵다고 이야기한다. 깊은 바닷속이 무섭다고 소리를 높인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추억은 차곡차곡 쌓인다.

다음 날, 급치산 전망대를 찾았다.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이다. 자동차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진도 최고의 전망대다. 손가락과 발가락과 목탁과 거북과 사자 따위를 닮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서남쪽으로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조도(鳥島) 지구에 딸린 섬들이 보인다.
 
▲ 아리랑체험관  진도아리랑을 불러 보고, 전국의 아리랑 자료를 볼 수 있다.
ⓒ 정명조
 
▲ 금요국악공감  10월 마지막 주에는 평양검무보존회 초청공연 ’심향‘이 있었다. 관객들의 추임새가 우렁찼다.
ⓒ 정명조
아리랑마을에 있는 아리랑체험관에 들렀다. 멀리서 보면 장구 모양인데 가까이 가서 보면 북이다. 다른 곳과 달리, 진도는 북을 어깨에 메고 두 손으로 친다. 노래 부를 때 징과 꽹과리는 없어도, 북은 꼭 있어야 한다. 혼자서 아리랑을 불러 보는 방도 있고, 단체로 꽹과리와 징과 장구와 북 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방도 있다.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 남북을 통틀어 60여 종 3600여 수에 이른다고 한다. 전라도만 하더라도 진도아리랑을 비롯하여 7종의 아리랑(지도, 영암, 구례, 남원, 순창, 정읍)이 있다.

진도에 가면 누구나 흥겹게 한바탕 놀 수 있다. 수요일에 '진수성찬'(진도군무형문화재전수관, 오후 5시), 금요일에 '금요국악공감'(국립남도국악원, 저녁 7시), 토요일에 '토요민속여행'(진도향토문화회관, 오후 2시), 일요일에 '일요상설공연'(해창민속전수관, 오후 2시)이 봄부터 가을까지 펼쳐진다. 이들을 보고 나면 흥이 넘쳐 밤을 설치기 일쑤다. 그곳에 늘 홍주가 함께한다.

흥겨운 사람에게 더 흥이 넘치게 만드는 술

'진도 홍주'는 전남 무형문화재 제26호다. 기능 보유자였던 허화자 할머니도 허대의 후손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으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홍주를 자랑했다. 그가 보낸 세월을 이야기하며 눈물짓곤 했다.

이생진 시인은 평생 섬을 떠돌며 시를 썼다. 허화자 할머니를 만난 뒤 '허 여사!'라는 제목으로 시 다섯 편을 <어머니의 숨비소리>(우리글, 2014)에 발표했다. 1편 '진도 홍주'에서 '허 여사! 나는 처음으로 여자 이름에 감탄부호를 달았다'고 고백하고, 2편 '술이 주인이다'에서 홍주 마시는데 필요한 조건을 말한다.
 
<전략>
그제야 술이 묻는다
너는 술만큼 투명하냐
너는 술만큼 진하냐
너는 술만큼 정직하냐
이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내 얼굴빛
내 얼굴빛이 홍주빛일 때
비로서 내게 홍주 마실 자격을 준다
 
그리고 4편 '달을 빚는다'에서, 동갑내기 두 사람은 드디어 술친구가 된다.
 
달구경 가자 한다
그믐인데 무슨 달이냐 했더니
'술을 만드는 사람이 그것도 못 만들까봐' 하며
방에 들어가 누룩으로 달을 빚는다
술잔에 가득 찬 달이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하늘에 와서 살지 않겠느냐 묻는다
나를 흘긋 쳐다보고는
그녀가 먼저 머리를 흔든다
 
지금은 진도 군수의 품질 인증을 받은 양조장이 여섯 군데 있다. 모두 현대식으로 홍주를 만든다. 흥겨운 사람들을 더 흥이 넘치도록 하는 술을 만들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시름을 슬픔으로 끝내지 않는다. 슬픔의 절정에서 흥을 찾아 어깨를 들썩거린다. 초상집에서도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이 소리마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린다. 여기저기 펼치는 공연에서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설움을 가락으로 풀어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국내 하나뿐인 '민속문화예술특구'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 울돌목 이순신 장군  울돌목 해남 쪽 우수영에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이 있고, 진도 쪽 녹진리에 ‘지휘하는 이순신 동상’이 있다.
ⓒ 정명조
진도를 떠나며 우수영에 들렀다. 이순신 장군이 쓸쓸한 모습으로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큰 칼 대신 지도를 들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 우리 곁에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여전히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룰 것 같다. 온갖 시련을 슬기롭게 이겨내야 하는 나날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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