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의달의 재계 프리즘] 세기의 영업비밀 소송 D-10..LG·SK 배터리 전쟁 승자는?
“어떤 회사도 이런 식으로 멀쩡한 회사의 영업 비밀을 탈취해 가지는 않습니다. 세계 기업 역사상 전례가 없는 기술 탈취 행위 입니다.”(LG화학)
“대부분 대리, 과장급 직원들의 자발적인 이직(離職)이었습니다. 어떤 영업 비밀이, 얼마나 침해됐는지 LG측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SK이노베이션)
우리나라 재계 3, 4위 그룹의 주력 대기업이 정면 충돌해 벌이는 ‘세기(世紀)의 영업 비밀 소송'이 종착점으로 치닫고 있다.
◇동종 업계 대기업 격돌...한국 초유의 대형 장기 소송전
열흘 후인 이달 26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LG화학이 작년 4월 29일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전지(배터리·battery) 영업 비밀 침해 소송’ 최종 판결을 내린다. 판결은 당초 이달 5일 내려질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 확산 등으로 3주일 연기됐다.
ITC는 독자적인 조사 개시(discovery)권 등을 사용해 국내보다 훨씬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지식재산권 위반 여부를 판정하고, 해당 상품에 대한 수입 금지 명령 등을 내리는 미국의 준(準)사법 연방기관이다.
같은 업종의 대기업들이 ‘영업 비밀(trade secrets) 침해 문제'를 놓고 미국에서까지 수천억원대의 소송 전쟁을 1년 반 넘게 벌이는 것은 우리나라 산업계 초유(初有)의 일이다.
◇SK 패소 확정되면 ‘치명타’...두 그룹 미래에도 영향
재계 관계자들은 “'배터리 대첩'으로 불리는 이번 소송의 결과가 세계 전기차와 배터리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한다. 세계 전기차 배터리 사장은 매년 평균 25%정도씩 성장해 2025년 180조원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막판 합의 없이 SK이노베이션의 패소가 확정된다면, 막대한 배상금과 이미지 훼손, 미국 수출 전면 금지 같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두 회사의 미래 성장동력 확보 노력에는 물론 두 그룹의 명운(命運)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소송전은, 최근 수년 간 LG화학 전지사업본부의 핵심 인력 100여명이 SK이노베이션으로 이동하면서 배터리 관련 핵심 영업 비밀과 특허 유출 논란이 불거지면서 시작됐다. 이에 LG화학이 작년 4월 SK이노베이션을 ITC에 제소했고, 같은 해 9월에는 두 회사가 특허 침해로 상대방을 서로 고소했다.
◇ITC, “SK측에 惡意 있다”며 LG에 ‘예비 승소’ 판결
ITC에는 양사 간의 소송 3건이 계류 중인데, 이번에는 ‘영업 비밀침해 소송’ 최종 판결이 내려진다. 지금까지 판세를 보면 LG화학이 우위에 있다.
먼저 ITC는 올해 2월14일 양사간 영업 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 판결(Default Judgment)을 내렸다. 조기 패소 판결은, “지식재산권 분쟁에서 재판을 더 진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 쪽의 침해 사실이 명백해 보인다”며 ITC가 내리는 ‘예비 승소(勝訴)’ 판정이다.
올 3월20일 공개한 ‘조기패소 판결문’에서 ITC는 “SK가 LG의 영업비밀에 대한 침해 행위를 전사적으로 벌였고, 소송 증거들을 조직적으로 인멸했고, 사실(事實) 관계 자료 확보를 방해해 LG에 피해를 끼친 것이 명백하다”고 결론내렸다.
◇ITC 판결에 대해 “합당하다” vs “뒤집힐 것”
판결문을 쓴 캐머론 엘리어트(Cameron Elliot) 행정판사는 “ITC 조사관도 SK이노베이션의 인멸 행위에 대한 증거와 후속 행위 등은 SK이노베이션 측의 악의(惡意)의 존재 및 조기 패소판결이 합당함을 지지한다'고 진술하며 동의했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이 3만4000여개의 파일 삭제로 ‘증거 인멸’을 했고, 파일 복구 명령 위반으로 ‘법정 모독’을 했다는 것이다.
국내 법원 1심도 LG화학의 손을 들어줬다. 작년 10월22일 SK이노베이션이 법원에 LG화학을 상대로 낸 특허침해 소(訴) 취하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재판장 이진화)은 올해 8월27일 SK측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지난달 27일에는 ITC산하기관인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이 LG화학의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제재 요구에 ‘찬성’ 의견을 밝혔다.
◇2010년 이후 ITC ‘조기 패소 판결’ 뒤집힌 적 없어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은 “ITC의 최종 판결이 조기 패소와 달라질 수 있다”며 “끝까지 간다"는 입장이다. 취재 결과, 최종 판결 전 양사간의 합의를 위한 물밑 대화나 접촉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SK측은 ‘ITC 판결문이 증거 인멸과 법정 모독 등에 집중하고 영업 비밀 침해의 구체적인 내용을 적시하지 않은’ 점에 주목한다. 또 SK의 재검토 신청에 대해 ITC가 5명 위원 만장 일치로 조기 패소 판결 ‘전면 재검토’를 결정한 데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한 임원은 “LG측이 포괄적으로 배터리 영업 비밀 전반이 침해당했다고 말할 뿐 어떤 영업기밀이 어느 분야에서 얼마나 침해당했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지식 재산권 문제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영업 비밀 소송의 본질은 영업 비밀 침해가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이며, 증거 존재 여부는 곁가지 문제”라며 “미국에선 조직적인 증거 인멸과 포렌식(forensic) 거부 자체가 영업 비밀 탈취 행위를 인정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LG 관계자는 “SK가 어떤 영업 비밀을 어떻게 사용해 소재·부품·셀·모듈 등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세부 목록을 소송 초기부터 ITC에 수차례 제출했다"며 "SK가 억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ITC가 2010년부터 2018년까지 내린 ‘영업 비밀 침해 소송’ 판결에서, ‘조기 패소’ 판결이 뒤집어진 사례는 없다.
◇LG와 SK, 누가 승리할까? 최종 결론은?
재계에서는 이달 26일 최종 판정 이후 3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한다.
먼저 ITC가 올 2월 내린 조기 패소 판정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SK이노베이션이 만든 배터리 제품과 부품·소재 등의 미국내 수입이 금지된다. SK가 연방법원에 즉각 항소해도,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입 금지는 계속 된다. 단, 60일 이내에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산업에 미칠 악영향을 이유로 거부(veto)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1916년 ITC 설립 이후 미국 대통령이 ITC의 영업 비밀 침해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前例)는 없다.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이 ITC 판결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삼성전자와 애플간의 ‘특허 소송’에서였다.
재계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상관없이 ‘영업 비밀을 침해한 악덕·불량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힌 기업은 글로벌 비즈니스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번째는 ITC가 조기 패소 판정을 인용하되 공익 관련 부분을 재검토해 ‘수입 금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판결하는 것이다. 이 경우 미국 주(州) 정부와 시(市) 정부, 미국 협력 기업 등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공청회가 열릴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은 올 2월 조기 패소 판정에 대해 ITC가 ‘수정(Remand)’ 지시를 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소송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빨라도 6개월 후에 다시 최종 판결이 내려진다.
◇“M&A로 성장한 기업이 소모적인 소송전 장기화”
‘제2의 반도체’로 불리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LG화학은 세계 1위, SK이노베이션은 세계 6위에 올라있다(‘SEN리서치’ 자료). 두 회사 모두 전기차 배터리를 포함한 2차 전지 사업을 차세대 주력 성장 분야로 정해 놓고 있는 만큼, 소송 전쟁에서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재계에서는 두 대기업이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외국 로펌들에 소송 비용으로 수천억원을 써가며 소모적인 공방(攻防)을 1년 반 넘게 벌이고 있는데 대해 아쉬워 하는 목소리가 많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오랜 연구개발(R&D) 노력 보다는 외부 인수합병(M&A)으로 주로 성장한 기업이 ‘영업 비밀 침해’ 문제에 스스로 눈감고 소모적인 소송을 장기화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영업 비밀 침해는 기업 존망 좌우하는 중대 범죄 행위"
전문가들은 이번 ‘세기의 영업 비밀 소송’을 계기로 무형(無形)의 지식 재산권에 대한 기업들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코카콜라의 ‘영업 비밀’인 레시피가 유출되면 코카콜라가 망할 수 있듯이, 영업 비밀 침해가 기업과 국가의 존망(存亡)을 좌우하는 중대 범죄(重大 犯罪)라는 인식이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홍대순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 법원들은 특허와 하드웨어 제조 기술 이슈는 중시하면서도 영업 비밀 침해는 경범죄(輕犯罪)처럼 다뤄왔는데, 이런 후진적 풍토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손승우 중앙대 교수(산업보안학)는 “우리나라도 세계 10위권 경제국 답게 상대 기업의 지식 재산권을 침해했을 때에는 기꺼이 배상·사과하며 공정하게 경쟁하는 시장 질서가 정착돼야 한다”며 “그래야만 중소기업이 보유한 영업 비밀이나 특허를 대기업이 침탈하는 행위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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