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쌍영총 벽화, 눈으로 직접 본다

노형석 2020. 10. 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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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 '빛의 과학' 특별전 11월15일까지
‘빛의 과학’전에 처음 공개된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주요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 여인상을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갸름한 얼굴에 입술을 칠하고 볼에 곱게 화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 168.7㎝, 너비 182.7㎝. 어른의 몸체 크기만한 1600년 전 벽화편으로 다가가자 가슴이 떨렸다.

곱게 화장한 1600년 전 고구려 여인들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입술에 색칠하고 볼에는 연지를 찍었다. 그들은 순박하면서도 야무진 표정으로 맞은편의 모자 쓴 고구려 청년들을 바라보며 열을 지어 서 있다. 시선을 옮기니 바로 위쪽에 당당한 표정으로 갑옷을 차려입은 개마무사가 보이고, 그 옆쪽엔 한가로이 소가 끄는 수레를 모는 시동이 있다. 다시 위쪽을 주시하면 깃발을 들고 걸어가는 남성들의 행진 모습이 자리한다. 5세기 말 도읍 평양을 중심으로 우아하게 농익은 고구려 벽화미술 특유의 도상인 ‘남녀거마도’(男女車馬圖)다.

‘빛의 과학’전에 처음 공개된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주요 이미지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 여인상을 가까이에서 찍은 모습. 갸름한 얼굴에 순박한 눈매가 인상적이다.

코로나19 재확산 사태로 곡절 끝에 지난달 말 재개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의 특별전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11월15일까지)의 하이라이트는 사상 처음 관객에게 공개된 고구려 쌍영총 벽화편이다. 이 유물은 1913년 일본 학자들이 평양 외곽의 평안남도 용강읍의 고구려 고분 쌍영총에서 처음 조사했던 무덤 내부 벽화들 가운데 일부로 원래 널길 동쪽 벽에 붙어 있었다. 1920년대 혹은 1930년대 훼손돼 떨어진 것을 당시 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수습해 소장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까지는 일제강점기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복원도만 알려져 있다가 박물관이 전격적으로 벽화편을 대중 앞에 공개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고적도보>에 나온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 복원도. 오늘날 학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쌍영총의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고구려 벽화는 북한이나 중국 만주의 석실무덤에 있어 실물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뜻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전시에 조각편이 등장한 쌍영총과 개마총을 비롯해 감신총, 고산리 1호분, 운봉리 고분 등의 벽화 조각을 무려 262건 401점이나 소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박물관이 수집한 뒤 해방 이후 그대로 인수해 보관해온 것들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총독부 당국과 일본 학자들은 1910년 평남 대동군 대성산성 고분 조사를 시작으로 1941년 평남 중화군 진파리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다. 이들 가운데 벽화무덤만 30기에 이르렀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벽화편은 일제의 이런 적극적인 조사의 부산물이다.

이상한 점은 수집된 벽화 조각편 가운데 구체적인 수습·수집 경위에 대한 기록이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편은 최소한 80년 이상의 수장 내력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대중에 선보였던 것은 쌍영총 고분의 널길 서쪽 벽에 붙어 있다 수습된 말 탄 기마무사상을 그린 조각이 유일하다. 그나마 이 조각도 주로 복제품으로 선보였을 뿐이다.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적외선 촬영 이미지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에서 지난해와 올해 작업해 ‘빛의 과학’전에 처음 내보였다.

고구려 벽화편의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이렇게 홀대를 받는 것엔 속사정이 있다. 1904년 평남 강서군수 이우영이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대묘 안에 들어가 벽화를 확인한 것을 계기로, 20세기 초 고구려 벽화는 일본 학계는 물론 서구 학계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집중 탐구 대상이 됐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민심을 자극했다. 외지 연구자들이 몰려들자 주민들 사이엔 벽화 무덤 속 회벽이 신통한 영약 재료여서 외지인들이 찾아온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회벽을 갈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돌면서 벽화무덤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고구려 벽화 전문가인 전호태 울산대 교수는 “20~30년대 이런 속설 때문에 평안도 일대의 고구려 벽화무덤 상당수가 파괴·훼손에 직면했고, 유적의 정비 보존을 위해 파견된 당국자들이 벽화 파편을 급히 거둬 박물관에 가져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쌍영총 벽화편과 함께 처음 공개된 개마총 벽화편의 적외선 촬영 사진. 태양 안에 다리 셋 달린 삼족오와 구름무늬 등이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벽화편들을 수습하고 보관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기록이 전혀 남지 않았고, 후대 학예사들도 유물의 내력과 정확한 연고를 알지 못해 사실상 수장고에 파묻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전시에 나온 쌍영총의 행렬도 벽화편과 개마총의 삼족오 무늬 파편들은 이런 방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세상에 나왔다. 지난해 보존과학부와 고고역사부 학예사들이 적외선과 엑스선 투과 기술을 활용해 정밀한 도상을 확인하고 연고 무덤을 밝힌 성과를 업고 출품된 것이다. 쌍영총은 국내 학자들에게 전혀 개방된 적이 없고 개마총은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됐다. 박물관 쪽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쌍영총과 감신총의 다른 벽화 조각편들도 별도로 해체 보존 처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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