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다.
[고구려사 명장면-107] 649년 5월 당 태종이 숨을 거두면서 그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고구려 원정 계획도 중단되었다. 게다가 당 태종은 요동 원정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뒤를 이어 즉위한 당 고종 초기에는 당 태종의 처남인 장손무기가 당 태종의 유지를 받고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대외적으로 유화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눈앞에까지 다가온 대규모 전쟁에서 벗어나 고구려도 이제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당 태종이 645년 원정에서 되돌아간 뒤에 고구려 정부는 당과 화평 관계를 열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는 등 나름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당 태종이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소규모 군대를 보내 고구려 후방을 기습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는 동시에 649년의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 준비를 하였음은 앞서 살펴본 바다.
이렇게 강경파인 당 태종의 죽음은 고구려와 당 관계에 새로운 변수가 될 수 있었지만 당시 고구려로서도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먼저 당과 화평 관계를 수립하는 정책을 선택하는 길인데, 당시 장손무기 정권이 대외적으로 유화책을 취하였다 하더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 당 태종이 추진한 대규모 원정의 명분을 불식할 만큼 양자 관계를 개선시킬 요인은 별로 없었다.
즉 당 태종 원정의 명분이 연개소문의 패륜성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치죄되지 않는 이상 양국 관계를 개선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집권자 연개소문으로서도 어차피 화평 정책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 고구려가 당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외교 활동은 사료상으로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652년 정월에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당 태종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다음으로 당시 변동하는 국제정세에 속에서 당을 견제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연계하는 외교전략을 구사하면서 당의 침공에 대비해 적극적으로 방어책을 모색하는 길이다. 당시 고구려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사실 당 태종의 죽음은 주변 국가에도 영향을 주었다. 645년 원정에서 돌아온 당 태종을 칭송하는 국서를 올렸던 토번이 당 태종의 죽음 이후 당을 경시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서돌궐의 정세가 심각해졌다. 즉 서돌궐의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가 651년에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이라고 칭하면서 당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당은 여러 차례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서돌궐의 본거지에도 이르지 못하다가 657년에야 소정방(蘇定方)이 아사나하로를 생포하고 서돌궐을 궤멸시켰다.
645년 당 태종 원정 시에 고구려가 말갈을 통해 당 북쪽의 설연타와 연결하려는 전략을 구사한 바 있는데, 마찬가지로 이때 서돌궐이 흥기함에 따라 고구려는 서돌궐과도 손을 잡으려고 시도했던 듯하다. 딱히 문헌 기록은 없지만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신도가 그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 기획 99회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 남은 고구려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한반도 내에서는 백제와 연계하여 신라를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고구려 세력권 재건을 시도한 영양왕 때부터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 점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목표는 동일하였다. 더욱 의자왕이 즉위하고 또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양국은 전략적인 이해관계를 일치시켜 갔다.
특히 645년 당 태종 침공 시 신라는 당 편에 서서 고구려 남경을 공격하였고, 이 틈을 타서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던 신라군을 회군케 한 바 있다. 실제 의도와 관계없이 백제가 고구려를 지원한 결과가 되었다. 이후 당은 백제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예컨대 651년에 백제가 당에 사신을 파견하자, 당 고종은 신라를 공격하지 말고 빼앗은 땅을 돌려주라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신라 편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백제도 652년 정월 사신 파견을 끝으로 당과 외교 관계를 다시 단절하였다.
이는 백제가 당 태종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를 파트너로 선택했음을 뜻한다. 백제가 당을 적대국으로 돌린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신라에 대해서만큼은 고구려와 백제 양국이 공동의 적으로 삼았음을 뜻한다. 백제는 647~649년 동안 매해 신라에 대해 공세를 취하여 전과가 적지 않았지만 매번 신라 김유신의 반격으로 결과적으로는 얻은 바가 그리 없었다. 백제 단독으로 펼친 신라에 대한 공세에서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정세에서 연개소문과 의자왕의 이해 관계가 급속도로 일치되어 갔고, 그 결과 655년 정월에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의 30여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고구려 입장에서 볼 때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압박하여 남부 전선이 안정되어 가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렇게 남부 전선의 부담을 덜면, 대당 요동 전선에 힘을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대당 전략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와 맞물려 고구려는 서부 전선에서도 공세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요서 거란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654년 10월에 고구려 장군 안고(安固)는 고구려군과 말갈병을 이끌고 거란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였다. '신성(新城)'이란 이름은 고구려의 신성(중국 무순시 고이산성)이 워낙 유명하여 여기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안고가 공격한 신성은 거란의 신성으로 지금의 서요하 시라무렌 유역으로 비정함이 타당하다. 이에 송막도독(松漠都督)인 거란의 이굴가(李窟哥)가 반격하여 고구려군을 패퇴시켰다고 한다.
또한 '구당서' 위대가(韋待價) 열전에도 당의 장군 신문릉(辛文陵), 위대가, 설인귀 등이 토호진수(吐護眞水)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인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토호진수는 시라무렌하 남쪽 지류인 노합하에 비정된다. 이 전투와 신성에서 벌어진 안도와 이굴가의 전투가 동일한 전투인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 무렵 고구려가 요서 시라무렌-노합하 유역에서 공세적인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면 고구려가 이때 거란에 공세를 취한 배경은 무엇일까?
당에 귀부한 거란은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시에도 동원된 바 있으며, 그해 회군 시에도 당 태종은 영주에서 거란을 회유하고 번장인 굴가(窟哥)를 좌무위장군으로 삼아 포상한 바 있다. 거란은 그 뒤 648년에 송막도독부로 편제되어 당의 기미지배체제 내로 흡수되었기에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거란이 당의 유력한 지원군이 되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이 점은 651년 당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가 만약 내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즉시 거란과 번국을 시켜 요하를 건너 공격하게 하겠다"고 위협하는 언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654년 고구려의 거란 공격은 당의 이런 전략을 사전에 차단하고 교란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측 기록에는 고구려 장군 안도의 공격을 거란이 패퇴시킨 것으로 나오지만, 후일 660~661년에 거란이 고구려와 연계하여 당에 반기를 들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 고구려의 공격으로 거란의 일부 세력을 포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당 태종 사망 이후 당의 장손무기 정권이 유화적인 대외 정책을 펼치는 사이 고구려는 대신라 정책에서는 백제와 연합하여 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대당 정책에서는 서돌궐과 연결을 시도하거나 요서의 거란을 공격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의 모습은 영양왕 때 대외전략을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다시금 고구려 세력권의 재건을 시도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전략의 성공 여부는 이에 대한 신라와 당의 대응이 어떠하며, 거기에 고구려가 다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과연 고구려는 이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였을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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