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行 트럼프가 꼭 챙겨간 '이것'은? 美 대통령의 분신이 '풋볼'?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정미경 기자 2020. 10. 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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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대통령 전용 헬기 머린원을 타고 월터 리드 군 병원으로 향하는 사진들 중에서 ‘풋볼’ 사진도 포함돼 있더군요.

격한 몸싸움이 많이 벌어지는 미국 프로미식축구리그(NFL)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초 개막했다. 사진출처 뉴욕매거진
웬 풋볼? 3주 전쯤 코로나19를 뚫고 개막한 미 프로미식축구리그(NFL) 얘기를 하는 거냐구요? 아닙니다. 여기서 ‘풋볼’은 미식축구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핵무기 발사 비밀코드가 담긴 핵 가방을 말합니다. ‘풋볼’ 또는 ‘핵풋볼(nuclear football)’이라고 불리죠. 트럼프 대통령이 트랩에 오르기 전 ‘풋볼’ 전담 수행원이 매우 빵빵해 보이는 검정색 가죽가방을 들고 미리 헬기에 오르는 사진이 찍혔더군요.
2일 오른쪽 손에 ‘풋볼’ 핵가방을 들고 머린원 헬기에 오르는 대통령 수행원(왼쪽)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사진출처 데일리메일
핵 가방이 ‘풋볼’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건 냉전이 한창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드롭킥’이라고 불리는 핵전쟁 시나리오를 만든데 서 유래했습니다. ‘드롭킥’은 미식축구나 럭비에서 공을 땅에 한번 튀긴 뒤에 차는 킥을 말합니다.

핵 가방의 내용물이 궁금하시죠? 우선 무게가 20kg이나 나간다고 하네요. 할리우드 영화에서 빨강색 ‘핵 버튼’이 종종 등장합니다만 실제 핵 가방 안에 그런 장치는 없습니다. ‘블랙북’으로 불리는 75쪽짜리 핵 공격 가이드 책자, 대통령 피신장소 목록, 군 명령전달 지침, 대통령 진위 인증카드 등 4가지가 들어있습니다. 이 중 핵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대통령 권한 코드가 가장 중요합니다. ‘비스킷’으로 불리는 이 카드만 따로 꺼내 양복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대통령도 있습니다.

많은 미국인이 트럼프 대통령과 동행한 ‘풋볼’ 사진을 보면서 “백악관이 경황없는 와중에 그래도 핵 가방은 잘 챙기고 있구나”하고 안심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안심감이 중요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 듯한 매우 혼란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데다 ‘마러라고 릭’ 사건도 있었기 때문이죠.

‘릭 사건’은 2017년 아베 일본 총리가 플로리다 주 마러라고 리조트를 방문했을 때 열린 파티에서 한 손님이 ‘풋볼’ 수행원과 기념사진을 찍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건입니다. 친절하게도 “이 사람은 ‘풋볼’ 수행원 릭이야”라는 설명까지 붙였답니다. 하필이면 북한이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호를 시험발사하면서 난리도 아니었던 때였죠. 백악관 비서실장 급이 거치는 극도로 면밀한 인적사항 사전조사를 거쳐 군에서 선발되는 수행원이 무슨 생각으로 일반인과 기념사진을 찍고 페이스북에 올리도록 놔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릭’은 나중에 해고됐다고 합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의 플로리다 마러라고 파티에 초대된 손님(오른쪽)이 ‘풋볼’ 수행원(왼쪽)과 기념사진을 찍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사진출처 롤콜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핵 가방이 경호 소홀로 인해 노출되거나 마구 다뤄지는 경우가 꽤 많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1981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피격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비스킷’ 카드가 대통령 구두 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왜 다른 곳도 아닌 구두 안이냐고요? 당시 유력한 설(說)은 레이건 전 대통령이 평소 ‘비스킷’을 양복 안주머니가 아닌 양말 안쪽에 넣고 다녔다는 것이었죠. 병원에서 급히 양말을 벗기면서 구두에 떨어져 나중에 발견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일화는 199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워싱턴 시내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가 끝난 뒤 ‘풋볼’ 가방을 챙기지 않고 다른 보좌관들과 함께 떠나버린 것입니다. ‘풋볼’ 수행원은 나중에 나토 회의 장소에서 백악관까지 1km 정도를 혼자 터덜터덜 걸어갔다고 합니다. 사실 핵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타겠습니까, 택시를 타겠습니까. 걸어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다행입니다.

이밖에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주머니에 ‘비스킷’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양복을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일화도 있습니다. 또 당시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풋볼’ 가방 내용물을 모두 뺀 뒤 맥주 빈 캔과 콘돔 한 개를 넣어 카터 전 대통령에게 보여주면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고 하네요.

전 세계의 생명과 안전이 달린 핵 가방을 이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걸까요. 이름만 봐도 ‘풋볼’ ‘비스킷’ ‘드롭킥’처럼 너무 경박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사에 무게 잡지 않는 것이 미국적 사고방식 아니겠습니까. 심각해야 할 때는 심각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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