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도 성교육도 쉬쉬하기 바쁜 'n번방의 나라' [정지혜의 빨간약]
온 국민을 경악케 한 디지털 성착취 범죄 텔레그램 n번방을 세상에 처음 알린 대학생 취재팀 ‘추척단 불꽃’이 출간한 르포 에세이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추적단 불꽃·이봄), 성매매 여성을 20년 넘게 지원해 온 활동가가 성매매 시장의 비상식을 폭로하는 책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신박진영·봄알람), 그리고 디테일한 묘사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가 결국 여성가족부가 회수를 결정한 덴마크 성교육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페르 홀름 크누센·담푸스)까지.
이 책들은 오늘날 한국의 성(性) 담론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 성에 눈을 뜰까 두려워 성 엄숙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의 성매매 시장이 세계 6위 규모이며, 성 착취 범죄는 점점 고도화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등이 그렇다.
해외 통계가 아니면 국내에서는 전체 성매매 산업 규모를 공식적으로 파악한 적도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양지에선 쉬쉬하고 음지에선 거대한 시장을 형성한다는 것. n번방은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기상천외한 일탈 범죄가 아니라 성폭력, 성착취 범죄에 관대한 사회에서 오랜 세월 진화를 거듭해 나온 결과물이다. 성착취물 제작, 유포, n차 판매에 이르기까지 산업화가 가능했던 건 그만큼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거대한 시장이 형성될 때까지 엄격하게 관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처벌마저 다른 나라보다 약한 설상가상의 상황이다.
성교육은 성교육대로 빈약하고, 비대해진 성매매 시장과 성 착취 범죄에 대응할 시스템은 미비한 총체적 난국이 되고 말았다.
◆조금도 진화 못한 성교육…‘심층적 고민’ 전무
“보기에 민망하며, 조기 성애화가 우려된다”(8월 25일 교육위 김병욱 의원)는 이유로 유명 성교육 책은 정부에 의해 신속히 회수됐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성교육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대안이 제시되지는 않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기존에 반복됐던 ‘민망하니 자연스럽게 알 때까지 기다리라’의 연장에 그치고 만다.
기존의 성교육이 실패에 가깝다는 건 부인하기 힘든 상황이다. 각계에서 근절되지 않는 권력형 성범죄, 회사와 학교 또는 또래간 단톡방 성폭력, 성착취물 공유 사이트 등 현대 성범죄는 갈수록 고도화된 형태로 일상에 만연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과거보다 더 일찍, 그리고 더 쉽게 성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에서 필요한 진짜 성교육은 무엇이고 어떤 형태여야 할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이번에 논란이 된 그림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의 경우, 단순히 ‘보기에 민망하다’ 수준을 넘어 아이들의 성 인지 감수성에 미칠 부정적 영향은 무엇일지,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하는지 등에 대한 대안이 뒤따랐어야 한다.
책이 말하는 대로 ‘성 행위는 그저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기만 할까. 일각에서는 이 책의 구체적인 묘사보다는 성 행위에 대한 단편적 인식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상대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 없는 관계가 얼마나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지를 동등하게 강조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답고 즐거운 행위’가 잘못하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같이 알려줘야 한다. 많은 성범죄들이 이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안 해서 일어나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비상식적’ 성매매 산업과 성교육 책 논란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권력자나 상류층 등장인물의 은밀한 만남은 여성 접대부가 있는 장소에서 이뤄지곤 한다.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은 한국을 “안마받으며, 술 마시며, 차 마시며, 여행 가서, 노래하다가, 이발하다가, 근무 중에… 등 언제 어디서나 성매매가 가능한 나라, 모든 것이 성매매화된 나라”라고 묘사한다. 이를 토대로 음지의 성착취 문화는 발달된 정보기술(IT)과 만나 신종 괴물의 형태로 진화해 덩치를 키우고, 아동 성착취물 공유사이트(W2V) 태동지로 국제적 망신을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포털사이트에 등록된 성매매 업소는 2393개로 전국의 고등학교 수보다 많고, 코로나19 대유행에도 석 달간 600만명이 룸살롱을 다녀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추적단 불꽃은 n번방 실체를 알린 지 1년이 된 지금 “제2의 n번방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런 n번방의 종말을 원하는 것이 섣부른 낙관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얼마나 바뀌어야 할까. 적어도 지금처럼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성교육, 성매매 산업 규모가 유지되는 한은 힘들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성교육 책의 서술을 민망하고 음란하다며 막기에만 급급한 수준으로는 갈 길이 멀다.
아이들이 ‘조기 성애화’되는 것은 정말 성교육 책 때문일까 되묻고 싶어진다. 상식을 집어삼키는 수준의 성매매 산업과 성착취 실태엔 눈 감은 채 책 한권을 문제삼는 일이야말로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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