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후] "직업이 의사라고? 그 전에 필요한 건.." 법원 '첨언'까지 해가며 질타

사정원 2020. 9. 2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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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11일 새벽 대전 서구의 한 아파트 인근 길가.

의사 A(28) 씨는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만취해 길가에 앉아있던 B(여·21) 씨를 보게 된다. 이어 A 씨는 B 씨에게 다가가 잠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마침 그때 B 씨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A 씨가 대신 전화를 받아 B 씨의 상태를 설명했다.

이에 B 씨 지인은 자신이 B 씨를 데리러 가겠다고 말했고 A 씨도 자신들의 현재 위치를 알려줬다. 이때 까지만 해도 A 씨의 행동은 전혀 문제가 없었고 술에 취한 여성을 돕는 ‘의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A 씨는 B 씨 지인을 기다리지 않고 B 씨를 택시에 태워 대전 유성구의 한 호텔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B 씨를 성폭행했다. B 씨 지인은 A 씨가 말한 곳에 찾아왔으나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경찰에 신고했고, 결국 A 씨는 준강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재판과정에서 A 씨 측과 변호인은 직업이 의사여서 피해자가 걱정돼 접근했고, 이어 합의로 성관계를 가졌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A 씨 측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범행 직후 측정한 피해자의 혈중알코올농도가 0.176%로 상당히 높았고, 두 사람이 객실로 들어가는 영상을 보면 피해자는 혼자 제대로 걷거나 서 있지 못하고 쓰러지는 등 전적으로 피고인에게 의지해 이동해야 할 정도로 만취해 있었다” 며 “이어 호텔 직원도 경찰에게 피해자가 만취한 상태로 끌려가다시피 들어갔다고 말하는 등 피고인은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유전자감정 결과 등 명확한 객관적 증거가 존재, 변호인이 성관계 사실을 인정함에도 피고인은 유사 성행위만 했을 뿐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 등 여전히 납득 할 수 없는 진술을 하고 있다”며 “피고인은 범행을 단순히 부인하는 것을 넘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함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하고 범행을 축소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질타했다.

대전지법 형사11부(김용찬 부장판사)는 오늘(25일) A 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또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와 함께 3년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등과 장애인복지시설 취업제한 명령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일면식도 없는 무방비 상태의 불특정한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며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사가 만취한 여성을 간음했는데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다만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고 있지 않은 점,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 준강간 사건에 대한 ‘의견’ 판결문에 첨언

한편,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피해자가 심신상실이었는지 또는 피고인에게 간음의 고의가 있었는지가 쟁점이 되는 준강간 사건에 대한 의견 4장을 판결문에 첨언했다.

재판부는 “많은 피고인이 ‘만취 상태의 여성 피해자는 암묵적으로 성관계에 동의할 여지가 크다’는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잘못된 통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다투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취해 길에 앉아있는 피해자는 성관계 합의의 의사를 제대로 표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며 “이번 사건의 경우 의사인 피고인이 했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의사 자격 이전에 필요한 건 사회 구성원에 대한 공감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마지막으로 “만취한 여성 피해자의 말을 진심이라고 믿고 이에 따라 성관계한 것이라는 주장을, 만취한 사람이 전 재산을 주겠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는 주장만큼이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여겨지는 통념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사정원 기자 (jws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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