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의 시인 "내 나이 구십에 이렇게 지독한 놈은 처음이라오"

류인하 기자 2020. 9. 2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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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 오늘부터 '서울 문해교육 시화전'

[경향신문]

25일 서울 문해교육 시화전에서 선보일 뒤늦게 글을 배운 어르신들의 작품. 왼쪽부터 ‘오늘보다는 내일’ ‘코로나가 갑자기’ ‘너무 힘든 아들한테’.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은 유튜브 채널로 시화전을 생중계한다. 서울시 제공
전쟁과 가난 탓에 배움 놓친 어르신들의 글·그림 온라인 공개
고단한 삶의 여정·코로나19를 겪는 소회 등 감동과 희망 담아

배움에 정해진 시기는 없다. 그러나 전쟁과 가난 탓에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에게 ‘글자를 알고, 내 생각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기능’을 익힌 것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매우 늦은’ 나이에도 배움을 놓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느라 학교 근처도 가보지 못한 일흔의 어르신부터, 죽기 전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 한 장을 써보고 싶어 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까지 많은 어르신들이 ‘학생’이 되어 한글을 배우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특별한 시화전이 25일부터 온라인으로 시민에게 공개된다.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이 ‘인생, 글을 만나 시와 그림이 되다’를 주제로 문해학습자 35명의 시와 그림을 담아 여는 ‘2020년 서울 문해교육 시화전’이다.

어르신 35명이 써내려간 시 35편 안에는 ‘코로나’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담겼다. 특히 서울특별시장상을 받은 윤집득씨(89)는 ‘코로나가 갑자기’라는 제목의 시에 “내 나이 구십에도 (이렇게) 지독한 놈은 처음이라오/ 여럿 사람 괴롭게 만드는/ 그이 이름이 코로나요./ 전국 방방곡곡 이런 난리가 있나요(중략)”라고 표현하면서도 “내가 그 녀석을 언제 알았던가 털고 일어날 날이 새벽처럼 올 거예요”라는 희망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윤씨는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강감찬관악종합사회복지관에서 문해수업을 들어온 ‘모범생’이기도 하다.

12세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두 동생을 데리고 남의 집 살림을 해온 이태욱씨(64)는 당시 겪었던 어려움과 마음의 상처, 결혼 후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후 홀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오늘보다는 내일’이라는 제목의 시에 담았다.

“오늘보다 내일은 괜찮겠지 하며 지냈다/ 살기 위해 식당일도 열심히 했지만(중략)/ 배움에 간절한 열정을 누가 막으랴(중략)/ 오늘보다는 내일이라는 희망을 갖고/ 또래들 만나서 즐겁고 재미있게/ 공부했던 평범한 날이/ 빨리 올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은 이씨에게 국가평생교육진흥원장상(우수상)을 수여했다.

정화봉씨(74)도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편지 형식의 시를 남겨 국가평생교육진흥원장상을 수상했다. 정씨는 ‘너무 힘든 아들한테’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래 그렇다고 실망하지 마라/ 태풍 불다가 지나가듯이/ (중략) / 그러다보면 살다보면 손잡고 노래 부르는 날이 올 것이야/ 아들아 좋은 날이 오지 않겠니/ 태풍 지나가고 잔잔한 날들 오지 않겠니/ 기다려보자”는 희망을 담았다.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일들과 마음속에 담아둔 많은 생각들을 써내려간 어르신들의 작품은 25일 오후 2시부터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의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볼 수 있다.

수상작 및 어르신 소감 등 영상은 서울시 평생학습포털(sll.seoul.go.kr)과 시화전 홈페이지(slec.kr)를 통해서도 10월 말까지 관람할 수 있다.

김주명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장은 “이번 시화전에 참가한 문해 학습자들이 쓴 시는 어떤 시인의 시보다 생생하고, 삐뚤빼뚤한 글씨는 어떤 명필의 글씨보다 큰 감동을 준다”며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많은 시민들이 꿈과 희망을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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