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왜 세종시로의 수도 이전에 침묵하나
수도 이전은 기득권과의 전쟁이다
한양은 어떻게 조선의 수도가 됐나
조선 초기 한양으로의 천도도 현재 세종시로의 수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온갖 풍파를 겪었다. 수도 이전은 심각한 권력 변동이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조선 초기 수도 후보지로 한양과 경쟁했던 무악(안산)과 그 남쪽에 자리잡은 연세대다. 류우종 기자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대대로 잘나가는 집안)이 싫어하는 일이다. 재상들은 송경(개성)에 오래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뜻이겠는가?”
1393년 2월 개성, 태조 이성계는 새 수도 후보지인 계룡산 자락을 살펴보려고 새벽부터 수레를 준비시켰다. 그러자 중추원의 종2품 관리인 정요가 현비(이성계가 사랑한 신덕왕후 강씨)가 아프고 평주와 봉주 등에서 도적이 나타났다는 도평의사사(뒤의 의정부)의 보고를 전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도적은 장교의 보고가 있었나, 어떤 사람이 보고했나” 하고 캐물었다. 정요는 대답하지 못했다. 새 수도 터를 보러 떠나는 이성계를 주저앉히기 위한 개성의 보수 기득권 대신들의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한양으로 가고 싶었던 이성계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의 수도 이전은 처음부터 실행될 때까지 비바람의 연속이었다. 1392년 7월17일(이하 음력)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한 달도 안 된 8월13일 도평의사사에 한양(현재의 서울 사대문 안)으로 도읍을 옮기라고 명령했다. 1067년 고려의 4경 중 남경이 된 한양은 고려 말에 새 수도 터로 자주 거론된 곳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수도 이전 정책은 초기부터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먼저 1393년 1월 남부 지방을 다녀온 권중화가 계룡산 남쪽을 새 도읍지로 제안했다. 현재의 계룡대 3군 본부 자리다. 이성계는 2월에 바로 계룡산을 찾아갔고, 새 수도 터로 결정한 뒤 즉시 건설을 지시했다. 그러나 열 달이 지난 12월 갑자기 계룡산 수도 건설을 중단한다. 경기도 관찰사이던 하륜의 반대 때문이었다.
하륜은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동·서·북쪽과 멀리 떨어져 있다. 또 계룡산의 땅은 풍수상 쇠퇴와 실패가 닥치는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하륜은 무악(안산) 남쪽을 제안했다. 현재 연세대와 신촌 일대다.
이번에는 하륜의 제안을 계룡산 남쪽을 제안했던 권중화가 반대했다. 1394년 2월 권중화 등은 “무악의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되자 정총은 고려의 수도인 부소(개성)를 계속 쓰자고 주장했고, 윤신달 등은 다시 한양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 밖에 황해도 불일사와 경기도 파주 선고개, 광실원, 도라산 등이 잇따라 제안됐다. 수도 이전 문제는 ‘봉숭아학당’이 됐다. 그러자 이성계는 1394년 8월11~13일 신하들과 수도 터에 대해 대토론회를 연다. 그리고 토론회 마지막 날인 8월13일 스스로 한양을 새 수도로 결정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9월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했고, 10월 이성계가 궁궐도 없는 한양으로 거처를 옮겨 12월 새 수도 건설을 착공했다. 1395년 9월 궁궐과 종묘를 완성했고, 12월 이성계가 경복궁에 들었다. 벼락같은 속도였다. 새 수도 터를 정한 지 1년4개월, 착공 뒤 1년 만이었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풍수학)는 “수도 결정은 권력투쟁 성격이 강하다. 당시 한양을 지지한 이성계, 무악을 지지한 이방원과 하륜, 계룡산을 지지한 쪽, 개성을 유지하려는 쪽 등이 경쟁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은 군사 방어, 한강을 낀 무악은 교통과 물류, 계룡산은 삼남의 생산력이 장점이었다. 그 투쟁에서 한양이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정종, 즉위하자마자 개경으로 후퇴
그러나 역시 수도 이전은 만만치 않았다. 천도한 지 겨우 3년 만인 1398년 이방원을 중심으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성계는 아들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고, 왕위에 오른 정종 이방과는 즉위 6개월 만인 1399년 3월 한양을 버리고 개경(개성)으로 돌아갔다. 이성계는 억지로 개경에 돌아간 뒤 “내가 한양에 천도하여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 환도하였으니,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고 피눈물을 흘렸다.
이성계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은 아버지를 왕위에서 쫓아낸 태종 이방원이었다.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즉위한 지 4년 뒤인 1404년 “송도(개성)는 왕씨의 옛 수도이니 그대로 살 수 없다. 여기에 도읍을 두는 것은 시조(이성계)의 뜻이 아니다. 내년 겨울에는 한양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막상 한양으로 가려고 하니 내키지 않았다. 이방원에게 한양은 배다른 동생들과 정도전, 남은 등을 대거 살해한 곳이었다. 그래서 한양으로 가는 대신 아버지가 처음 수도를 정할 때 한양과 경쟁했던 무악으로 가는 방안을 추진했다. 1405년 10월 풍수가·대신들과 직접 무악에 가서 토론했으나, 이번에도 의견이 갈렸다. 그러자 이방원은 한양과 무악, 송도를 두고 동전점을 치게 해서 결국 한양으로 새 수도를 확정했다. 수도 이전이 추진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방원은 살육의 현장인 경복궁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한양 향교동에 별궁을 짓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창덕궁이다. 그러면서 이방원은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무악에 도읍하지 않았지만, 후세에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도읍이 되지 못했고, 별궁인 연희궁이 들어섰다.
수도 이전은 21세기에도 쉽지 않다. 민주주의 시대라 기득권의 반대를 물리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 신행정수도 건설 정책도 200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2009년 이명박의 행정수도 백지화 추진 등 파란을 겪었다. 그래서 온전한 수도가 되지 못했고, 현재 행정부의 60% 남짓만 세종시로 옮겨진 상태다. 나머지 3분의 1의 행정부와 청와대, 국회, 대법원 등은 아직 서울에 남아 있다.
정석 교수 “정부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 지난 7월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국회와 청와대, 정부 부처를 모두 세종시로 이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가장 중요한 이전 주체인 청와대는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이 문제로 서울 기득권 세력과 일대 전쟁을 벌여야 함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도시학)는 “역사 속에서 수도 이전은 기존 수도에 기득권이 강해져서 개혁이 어려울 때 시도됐다. 현재 대한민국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정부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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