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참을 수 없는 '부동산 통계'의 가벼움
한세현 기자 2020. 9. 9. 09:27
미국에서는 음식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5초' 안에 집어서 먹으면 위생적으로 안전하다는, 이른바 '5초 법칙(five-second rule)'입니다. 재빨리 음식을 집으면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학자들이 실험에 나섰습니다. 결론은 "5초 안이라도 얼마든지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묻거나 음식에 들어갈 수 있다"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초'가 아니라 '어떤 바닥'인지였습니다. 당연하지 않은가요? 무균 상태인 실험실 바닥에는 온종일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득실거리는 바닥이라면 1초라도 위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5초의 법칙'은 땅에 떨어진 음식을 집어 먹으며 '과학'이란 이름으로 위안받으려는 노력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의 지적처럼, 어쩌면 사람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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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란 이름으로 위안받으려는, 이 '5초의 법칙'을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홍남기 경제부총리였습니다. 홍 부총리는 제6차 부동산 시장 점검 관계장관 회의에서 "8·4 공급대책 이후 1개월이 지난 현재, 나름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라며 "최근 실거래 통계 확인 결과 가격 상승 사례도 있으나, 상당 지역에서 가격이 하락한 거래도 나타나는 등 시장에서 쏠림 현상이 많이 완화됐다"라고 밝혔습니다. '집값 안정화', 이 얼마나 학수고대해온 말인가요? 더없이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기획재정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최근 서울 주요 지역 아파트 실거래가 하락 거래 사례'도 함께 전달했습니다. 강남, 송파, 마포, 노원 등 서울 전역에서 집값 안정화 효과가 본격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적어도 해당 통계 자료를 직접 찾아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기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 조회 사이트에 들어가 해당 아파트 단지 집값을 직접 찾아보니, 현실은 기재부의 설명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1. 서초구 반포자이(84.94㎡) : 7월 초 28.5억 원(25층) → 8월 중 24.4억 원(18층)
서초구 이 아파트, 기재부가 밝힌 것처럼 84.943㎡ 단지 실거래가가 28.5억 원 → 24.4억 원으로 떨어진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면적이 거의 같은 84.998㎡ 단지는 27.1억 원 → 28억 원으로 오히려 매매가가 상승했습니다. 오른 곳도 있는데 기재부는 떨어진 곳만 선별적으로 뽑아서 전한 것입니다.
더욱이, 한 달여 만에 집값이 14%(4.1억 원) 넘게 급락했다면 정상적이지 않은 거래일 가능성도 큽니다. 현지 공인중개사들도 "매수자가 가족이나 친척, 혹은 지인인 사실상 특수 관계인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추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기재부에 질의하자, 담당자 "다주택자나 법인이 내놓은 급매물일 수 있는데, 정상 거래인지 아니면 부정한 특수 거래인지는 확인 못 했다. 최고가 기록하고 오르는 집들도 있는데,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데, 어쨌든 떨어진 것도 일부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가는 수장이 내놓은 사례로서 적합한지,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2. 송파구 리센츠(27.68㎡) : 7월 초 11.5억 원(5층) → 8월 중 8.95억 원(19층)
3. 마포구 마포래미안푸르지오3단지(59.92㎡) : 7월 중 14억 원(4층) → 8월 초 11억 원(7층)
4. 노원구 불암현대(84.9㎡) : 7월 초 6.8억 원(19층) → 8월 초 5.9억 원(17층)
물론 거래가 드문 가운데 집값 상승이 주춤하고 안정되는 추세는 맞습니다, 앞으로 더 안정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그렇게 될 것이지만, 이렇게 극적인 수치만 쏙 빼서 쓰는 담당 공무원들의 모습은 국민의 인정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
사실, 집값 통계를 둘러싼 논쟁은 현 정권 들어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서울 아파트값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2배인 52% 상승했다고 주장하자, 국토부는 다음 날 바로 14.2% 올랐을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 논쟁은 국회에서도 이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또, 경실련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년 동안 땅값 상승률이 2천조 원 올랐다고 주장하자 국토부는 국가 통계 신뢰성을 훼손했다며 발끈했습니다. 최근에는 "현 정권 들어 서울에서 거래된 1천억 원 이상 빌딩의 공시지가가 정부 주장처럼 시세의 67%가 아닌 40%에 불과하다"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정부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국민 상당수는 정부가 맞기를 바랄 것입니다. 현실이 그나마 덜 안타깝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그런데 앞서 설명 드린 것처럼, '정부가 입맛에 맞는 통계만 골라서 보여준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을 수 없는 통계의 가벼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우리나라 경제 컨트롤타워인 경제부총리의 발언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같은 경제당국에 대한 불신은 단순히 부동산뿐 아니라 재난지원금 등 다른 분야로도, 코로나19가 퍼지듯 확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필요합니다. 더 밝은 내일을 기대하는 희망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어두운 골목에서 동전을 잃어버리고도, 대로변 가로등 밑이 밝다고 거기서 동전을 찾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설명하며, 그 안에서 해결책을 보여주는, 그런 정부의 모습을 국민은 기대합니다. 착시가 아닌 진짜 부동산 시장의 안정을 바랍니다.
한세현 기자vetm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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