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국가폭력에서 시간은 누구 편인가
[경향신문]
적폐청산이 과거사마저 모두 청산한 듯한 착시를 일으키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는 1987년 8월 노동자의 평화시위를 보장한다던 경찰이 직격으로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1983년 성균관대생 이윤성은 학생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징집됐다가 신군부의 녹화사업으로 희생됐다. 서슬 퍼런 신군부가 집권하는 동안 이들의 유족이 국가에 맞서 법적 책임을 추궁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민주화보상법을 도입해 삼선개헌 이후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다가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민주화운동 관련자’라는 명예를 부여하고 보상금도 지급했다. 그러나 그 보상금은 희생자와 가족이 겪은 피해를 회복시키고 고통을 위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더 큰 문제는 이 법이 재판상 화해와 같은 세련된 방식을 통해 보상금을 수령한 사람들에게 추가적인 소송 기회를 합법적으로 봉쇄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려는 유족들의 도전이 계속되자 헌법재판소는 2018년 마침내 이 법의 일부 조항을 위헌으로 결정했다(2014헌바180 등).
헌법재판소는 민주화보상법이 소득 상실분만 고려하고 희생자와 그 가족이 입은 정신적 피해를 제외했다는 점을 들어 그렇게 결정했다. 국가는 결정의 취지에 따라 이 법을 개정해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제공해야 했지만 어떠한 보완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석규의 유족은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4월 1심 법원은 민주화보상법의 문제점이나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취지를 외면하고 유족이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의 인정일(2003년 11월11일)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소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 사건은 현재 항소심에서 다투는 중이다. 이윤성의 유족이 제기한 소송은 이제 시작되었다. 법적 쟁점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두 사건에 대한 판결이 유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공산이 크다.
민주화보상법이 소멸시효를 배제하는 입법인지에 대해서는 견해차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보상법 자체가 유족에게 다른 구제수단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구조적 설정이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법원이 유족들을 상대로 소멸시효를 원용하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다. 헌법재판소가 민주화보상법을 위헌으로 결정한 시점에서 비로소 이러한 봉쇄구조가 법적으로 와해된 것이다. 이 경우에도 굳이 시효의 쟁점을 고수하려 한다면 보상심의위원회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일(2003년)이 아니라 위헌 결정일(2018년)을 시효기산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두 사건의 유족들은 모두 위헌 결정일로부터 3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소를 제기했기 때문에 법원은 이들의 청구를 인용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누구 편인가? 시효는 원칙적으로 사사로운 개인들 간의 청구권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국가가 자신의 불법행위 앞에서 시효를 원용하는 것은 헌법상 국민 보호 의무뿐만 아니라 신의칙마저도 저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이미 다수의 과거사 판결에 반영되었다. 국가권력의 불법에 대해서는 시효가 없다는 그 논리로 우리는 일본을 상대로 한 투쟁을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재승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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