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이하늬·주영재 기자 2020. 8. 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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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바라본 강남의 아파트단지/ 김기남 기자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와 비리는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입주자대표회의(입대회)는 이를 잘 안다. 동대표들로 구성된 입대회는 아파트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아파트 관리비는 입대회 회장의 승인 없이는 단 1원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각종 업무는 관리사무소가 집행하지만, 관리사무소를 선정하고 감독하는 주체는 입대회다. 입대회의 손발 노릇을 하는 관리사무소가 많은 이유다.

“그래서 입대회는 각종 공사에서 뒷돈을 챙길 욕심이 있는 사람들, 사무소 직원들에게 회장님, 대표님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 정기회의 때 지급되는 회의비나 임원 수당을 생활비에 보태고 싶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돼 버렸다.”(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입대회는 건강한 아파트를 만들고자 하는 이를 반기지 않는다. 온갖 방법으로 괴롭혀 쫓아낸다. 아파트는 다시 그들만의 왕국이 된다.

1단계 : 불편과 몰상식
입주민이 아파트 자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상식 밖의 일이나 불편한 일이 벌어졌을 때다.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이정인씨(33·가명)도 그랬다. ‘자동출입문’이 발단이 됐다. 입주민들은 카드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 다른 아파트는 카드와 비밀번호, 휴대전화 어플까지 동시에 사용해 출입문을 여닫는데 이해가 안 됐다. 입주민들의 항의에도 입대회와 관리사무소는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라며 꿈쩍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대체 카드키가 뭐기에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되서” 회의까지 방청했다. 회의에서는 회장을 제외하고는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질문도 금지됐다.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서 있다가 회의가 끝났다. 이씨는 “회장의 왕국 같았다. 너무 놀랐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입주민들이 방청신청을 하자 입대회는 ‘공정성을 해칠 이유가 있다’며 제한했다. 방청 거부를 계기로 아파트에는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꾸려졌다.

서울 마포구 한 아파트에 살았던 차윤주씨(38)를 불편하게 만든 건 ‘쓰레기 처리’였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참관한 동대표 회의에서 상식 밖의 이야기가 오갔다. 일반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를 섞어버리는 사람이 많아 업체가 수거를 거부하겠다고 하자, 웃돈을 쥐여주자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당시 기자로 일하던 차씨는 이를 기사화했다. 불법이었기에 아파트와 구청이 뒤집혔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동대표에 출마했다. 물론 쓰레기 문제만 있었던 건 아니다. “10년 동안 혼자 살았는데 이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층간소음이 해결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맞물려서 동대표에 출마했고 당선됐다. 그게 흑역사의 서막인지도 모르고….”

2단계 : 비리 의혹과 분노
노원구 아파트 비대위는 출입문 비밀번호 사용과 회의 방청거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제야 입대회는 입주민 찬반 투표로 결정하자고 했다. 일견 타당하게 들렸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입주민의 분노만 샀다. 투표는 경비노동자가 투표용지를 들고 집마다 찾아다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비노동자의 업무가 아닐 뿐더러 투표용지에는 일부 세대가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른바 ‘불만세력’이 사는 세대였다. 일부러 이들 세대는 방문하지 않은 다음, 기권으로 처리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실제 경비노동자는 형광펜이 칠해진 세대를 방문하지 않았다.

주민들 사이에서 의문은 커져갔다. 도대체 카드키가 뭐길래? 그거 얼마나 한다고? 여기에 <아파트에서 살아남기> 저자 김효한씨는 이렇게 꼬집었다.

“아파트 비리는 각각의 건수만을 보면 그 액수가 크지 않다. 관리비 조작도 한 세대당 천원, 이천원 더 물린다면 1000세대일 경우 100만~200만원이다. 얼핏 보면 그리 많아 보이는 액수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는 식으로 갖가지 방법에 따라 챙기는 돈을 다 따져보면 한 달에 수천만원은 거뜬히 나올 수 있다. 창조경제가 무색할 지경이다.”

아파트 관리비 비리 문제는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비대위는 자동출입문과 자동차차단기 사업이 수의계약으로 진행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여기에 7억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300만원 이상의 사업은 공개입찰이 원칙이다. 이에 입대회는 “관리비가 아닌 서울시 지원금을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수의계약을 막는 이유는 비리가 개입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인데, 관리비가 아닌 지원금을 사용했다며 빠져나가는 것이다.

마포구 아파트에서 동대표가 된 차씨는 그동안 해당 아파트의 물청소 비용이 다른 건물의 4배에 이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재비 차이만 10배가 넘었다. 그는 “부풀린 견적서를 내서 입찰을 받게 하고, 이를 토대로 관리비를 책정하는 구조라면 횡령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합리적인 의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전 입대회를 배임혐의로 고발했다.

남기업 소장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아파트 민주주의>에 “아파트의 예년 알뜰시장 업체 낙찰가는 8천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회장이었던 해에는 8000만원 하던 낙찰가가 2600만원으로 폭락했다. 나머지 5000만원 가령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 동안 업체와 입대회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3단계 : 수난의 시작
포기하지 않으면 괴롭힘이 시작된다. 남 소장의 경우, 입대회 회의가 공격의 장으로 변했다. “감사가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안건토론을 하다가 나에게 논리가 밀리는 것 같으면 핸드마이크 사이렌을 웽하고 울렸다. 순식간에 회의 장소가 사이렌 소리로 가득 찼고, 그 광경을 보고 저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도 남 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나지 않자, 반대쪽 동대표와 관리소장은 고소·고발 작전을 사용했다. 그는 2016년 한 해에만 11번 고소를 당했다. 그는 책에 “저들이 나를 고소한 사건은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무혐의 처분이 내려질 줄 알면서도 나를 고소한 것이다”라고 썼다.

마포구의 동대표 차씨도 업무방해와 명예훼손은 기본이고 심지어 ‘절도죄’로 고발을 당했다.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차씨는 회장이 돼 직인을 받았는데, 그가 이 직인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차씨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상한 혐의로 고발을 당하면 이른바‘멘붕’이 온다”고 말했다. 그는 동대표를 한 덕분에 고소·고발장 쓰기의 달인이 됐다.

4단계 : 이대로 당할 수 없다, 반격
다시 노원구 아파트. 비대위는 입대회가 방청을 제한한 것부터 구청에 신고했다. 노원구청은 이는 관리규약 제27조(회의방청)를 위반한 사항이라며 시정명령을 내렸다. 이어 비대위는 500가구 이상의 서명을 받아 서울시에 감사도 요청했다. 서울시는 해당 아파트에 대해 지난 6월 말부터 10일간에 걸쳐 감사를 진행했다.

다음은 회장의 동대표직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회장은 6년째 동대표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해당 동 가구의 10% 서명을 받으면 해임투표에 부칠 수 있다. 비대위 관계자 A씨(40)는 “애초 그 사람은 석연치 않은 과정을 통해서 동대표, 회장까지 됐다”고 말했다. 같은 동에서 출마한 사람이 있을 경우, 기존 동대표는 출마할 수 없다. 하지만 아파트 선거관리위원회는 ‘자필이 아니다’라는 등의 이유로 다른 출마자의 자격을 박탈했다. 이 건으로 아파트 선관위는 과태료 500만원을 부과받았다.

마포구의 차씨는 제도를 바꾸는 방식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동대표와 회장의 활동비와 회의 참석 수당을 대폭 삭감했다. ‘콩고물’을 없애버린 것이다. 구청 감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규약도 고쳐 구청의 감사를 받게 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동대표가 되는 것도 좋지만 외부감사를 받는 제도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남 소장은 ‘비리의 몸통’인 관리소장을 형사 고소했다. 관리소장이 멋대로 회장 직인을 사용해 회의를 의결하고, 이 서류를 수원시에 보낸 것을 사문서위조와 위조 사문서행사로 고소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를 유죄로 인정했다. 관리소장은 전과자가 돼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서는 입주자대표회의와 비상대책위원회가 갈등을 겪고 있다. 이들이 입주민들에게 배포한 전단지 / 이하늬 기자


5단계 : 패배 혹은 포기
남 소장은 고생 끝에 아파트 내 개혁을 이뤄냈다.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보통 그 단계까지 가지 못한다. 이권을 노리는 이들은 동대표를 ‘직업’으로 하는데 반해 직장을 다니거나 아이가 있는 입주민은 그럴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입주민은 파도 파도 나오는 부조리 끝에 두손 두발을 들고 만다.

차씨는 구청의 감사를 받도록 규약을 바꾼 것을 가장 뿌듯한 일로 꼽았다. 하지만 그의 임기가 끝나고 새로운 동대표들로 입대회가 꾸려지자마자 해당 규약은 삭제됐다. 아파트는 다시 구청의 감사를 받지 않을 수 있게 됐다. 2년 동안의 고생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그는 이를 계기로 마포구 구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의지에 불탔던 이씨는 포기 상태다. 비대위와 별개로 이씨는 경찰에 신고하고 반차까지 내 감사를 하는 공무원도 찾아갔지만 소득은 없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모든 규약을 애매하고 복잡하게 해놨다”며 “뭔가 하고 싶어도 성과가 없으니까 포기하게 된다”고 말끝을 흐렸다.

해당 아파트의 비대위가 어렵게 안건으로 올린 해임투표는 부결됐다. 해임신청서에 서명을 해줬던 주민 13명이 갑자기 서명을 철회한 것이다. 아파트에는 회장이 누가 서명했는지를 알아내 주민들을 설득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해임투표는 없던 일이 돼 버렸다. 비대위 관계자 B씨(37)는 “너무 억울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래도 아파트 민주주의
그래서 이들은 입주민의 관심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아파트에 사는 이상 입대회와 관리사무소는 필수다. 이들 없이 아파트는 돌아가지 않는다. 차씨는 “아파트는 가장 작은 단위라서 망가뜨리기 쉽지만 바꾸기도 쉽다. 방법은 하나다. 모두가 조금씩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원구 아파트의 비대위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비대위는 회장 해임 투표를 위한 서명을 다시 받을 계획이다. 나아가 서울시 지원금을 수의계약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제대로 감시하지 않은 ‘서울시 자원수난과’에 대한 감사원 감사도 요청할 예정이다.

아파트와 관련한 문제 의식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정찬민 미래통합당 의원은 300인 이상인 공동주택 입주자 등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는 경우 외부 회계감사를 받지 않도록 하는 규정을 삭제하는 내용의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노원구는 기존 평균 9.6년에 이르던 실태조사를 3년 주기로 하기로 했다. 인천시는 입대회 회의를 생중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비용을 지원한다.

노원구 공동주택지원과 관계자는 “아파트 내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줄이기 위해 관리소장 공영제, 아파트 관리비 계좌 거래내역 공개 등 법령을 세밀하게 만드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런 방향은 앞으로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차씨도 “다음 세대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실제 발 디디고 있는 직장이나 아파트에서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하늬·주영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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