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졸음의 몽매에서 인류를 깨운 의학자

최윤필 2020. 7. 27. 04:3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970년 스탠퍼드대 의대에 세계 최초 수면클리닉을 개설하고, 정신분석에서 독립한 잠과 꿈 강좌를 처음 열고, 첫 수면장애학회를 조직하고, 첫 수면 학술지 'SLEEP'을 78년 창간해 이끌며 '수면의학'이란 장르를 개척한, 그럼으로써 인류에게 잠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린 윌리엄 디멘트가 6월 17일 별세했다.

디멘트가 '수면 빚(Sleep Debt)', 즉 부족한 잠이 빚처럼 쌓여 "금융부채보다 국가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처음 주장한 건 85년 의회 청문회에서였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디멘트는 잠의 가치와 수면부족의 위험성을 사실상 처음 인류에게 알린 수면의학자다. 그는 근면 성실의 절대가치에 짓눌린 잠의 가치를 부각하며 '깨어 있음'의 몽매로부터 인류를 일깨웠고, 그러기 위해 스스로는 '수면 빚'을 쌓아가며 깨어 연구하고, 가르치고, 설득했다. 그는 미국이, 아니 인류가 수면부족과 수면장애라는 비상사태와 맞닥뜨렸다며, "졸음은 적색 경보"라고 호소했다. scopeblog.stanford.edu

"졸음은 위험-죽음의 적색 경보"

미국 연방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 국장을 지낸 마크 로즈카인드(Mark Rosekind)가 70년대 스탠포드대를 다니던 시절, 학부 졸업생 약 80%가 수강했다는 '전설'의 두 교양 강좌가 있었다. 정신의학자 헤런트 카차두리안(Herant Katchadourian)의 ‘인간과 성생활’, 수면의학자 윌리엄 디멘트(William Dement)의 ‘잠과 꿈(Sleep and Dreams)’이다. 청년기 갈증(섹스와 잠)의 반영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전복적 의미도 있었다. 전자는 당연히 60,70년대 성 혁명의 연장선 위에 있었고, 후자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 이래의 절대 미덕, 즉 근면성실과 ‘깨어 있음’에 대한 반박이었다. 디멘트는 졸리면 무조건 자야 하고, 더 중요한 건 졸리지 않도록 미리 충분히 자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디멘트는 수업 중 학생이 졸면 물총을 쏴서 깨운 뒤 '졸음은 적색 경보(drowsiness is red alert)’란 말을 복창하게 하는 대신 학점 인센티브를 주었다. 강의 요지를 '연극적으로' 구현하게 해준 데 대한 보상이었지만, 그래도 졸음을 못 이기는 이들은 잘 수 있게 했다. 그의 강의실 한 켠에는 늘 '간이 수면실'이 마련돼 있었다. 첫 강의가 시작된 71년 겨울학기 600명을 시작으로 그의 강좌는 한 학기 최대 1,200명에 이르는 등 근년까지 2만 여 명이 수강했다. 디멘트의 주문은 단 하나 ‘사회에 나가 저 메시지를 전하고 실천하라’는 거였다. 로즈카인드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를 거쳐 NHTSA를 이끌면서, 졸음이 음주나 약물, 정비 불량 못지 않게 심각한 항공 육상 교통사고의 원인임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스탠퍼드대 수면의학자 라파엘 펠라요(Rafael Pelayo)은 “만일 여러분이 수면 부족과 작업 안전의 관련성에 대한 말을 듣는다면 그건 모두 ‘빌(디멘트의 애칭)’ 덕분”이라고 말했다.

1970년 스탠퍼드대 의대에 세계 최초 수면클리닉을 개설하고, 정신분석에서 독립한 잠과 꿈 강좌를 처음 열고, 첫 수면장애학회를 조직하고, 첫 수면 학술지 ‘SLEEP’을 78년 창간해 이끌며 ‘수면의학’이란 장르를 개척한, 그럼으로써 인류에게 잠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린 윌리엄 디멘트가 6월 17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수면 빚은 금융부채보다 큰 위협

1989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원유 유출사고인 ‘엑슨 발데즈 참사’가 났다. 항로 전방에 암초가 있다는 경고를 두 차례나 받고도 항해사가 자동항법장치에 의존해 운항하다 빚은 사고였다. 조사 당국은 선장의 음주 사실을 부각했다. 하지만 사고 시점, 선장은 선교에 없었다. 사고 항해사가 이틀 동안 6시간 밖에 못 잔 상태였다는 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수면의 약속’, 윌리엄 디멘트 지음, 김태 옮김, 넥서스) 디멘트는 ‘항해사의 뇌가 경고의 심각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었다’며, 워싱턴D.C 의원들의 사무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수면장애의 위험성을 알렸다. 이듬해 3월 미 의회는 디멘트를 의장으로 ‘국립수면장애연구위원회’를 설립했다.

각계 전문가 20여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만 2년 조사연구를 거쳐 92년 말 보고서를 발표했다. 내용은 '미국이여 깨어나라! 국가 수면 경보(Wake up America! A National Sleep Alert)’란 제목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시민 약 4,000만 명이 수면장애를 겪고 있으며, 수백만 명은 잠 부족으로 인한 “지적 정서적 기능 저하”로 교통ㆍ안전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 상태이며, 그에 따른 생산성 저하와 의료비 등 사회적 비용이 90년 한해에만 최소 160억 달러에 이른다는 거였다. 수면장애란 말 자체가 없었고, 의사 대다수(약 95%)가 병증으로도 여기지 않던 때였다. 당연히 진단도 없었고, 치료도 없었고, 하더라도 엉뚱했다. 위원회는 수면무호흡증(sleep apnea), 기면발작(narcolepsy), 만성불면증 등 17종의 수면장애를 “생명과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는” 질병으로 규정했다.

디멘트가 ‘수면 빚(Sleep Debt)’, 즉 부족한 잠이 빚처럼 쌓여 "금융부채보다 국가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처음 주장한 건 85년 의회 청문회에서였다. 92년 보고서에는 야간 근무자 56%가 주 1회 이상 작업 도중 졸았고, 절반 이상 실수를 저질렀다는 조사 자료를 첨부했다. 1910년대 10~12세 청소년(평균 수면시간 10.5시간)보다 1990년 청소년(약 9시간)은 평균 90분 덜 자고, 13~17세도 9.5시간에서 7.5~8시간으로 잠이 줄었다는 데이터, 한해 고속도로 사고 중 약 7만 2,000건이 졸음 운전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실제로는 20만 건에 이를 거라는 NHTSA 분석자료도 첨부했다. '엑슨 발데즈' 이전,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79년)와 챌린저호 참사(86년)의 주목받지 못한 원인중 하나도 수면장애라 밝혔다.

정신분석학도였던 윌리엄 디멘트는 '꿈의 해석'보다 졸음의 불가항력적 위력에 더 매료돼 1953년 하찮게 여겨지던 수면 연구를 시작했고, 오늘날 '수면의학'의 신대륙을 개척했다. 1982년의 디멘트. stanford news service

‘파라 수면(서파 수면)의 연구자 미셸 주베를 소개하면서 수면 의학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본 바 있다. 그 기점이 1951년 미국 시카고대 생리학자 너새니얼 클라이트먼(Nathaniel Kleitman)과 박사과정 연구원 유진 애서린스키(Eugene Aserinsky)의 ‘렘(Rapid Eye Movement) 수면’ 발견이다.

의대에서 정신분석학을 전공하던 디멘트는 53년 애서린스키의 조수가 됐다. 잠과 꿈을 둘러싼 정신분석학 진영과 생리학 진영의 대립은 ‘전쟁’에 비유될 만큼 첨예하지만, 디멘트가 연구를 시작하던 무렵의 수면 의학(과학)은 한 마디로 “하품 나오던” 시절이었다. 디멘트는 ‘전향’의 계기를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학부 시절 내분비학 강의를 듣던 중 심하게 졸다가 강의실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는 꿈의 ‘메시지’보다 잠의 불가항력적 위력이 더 궁금했다. 디멘트는 어느 날 '렘수면이 꿈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에서린스키의 ‘심드렁한(offhand)’ 말을 듣곤 완전히 꽂혔다고, “그가 당첨 복권을 주었어도 그리 놀라진 않았을 것”(위 책)이라고 썼다. 그는 다원검사 기법을 활용해 수면의 주요 단계를 밝힌 논문과, 렘수면의 꿈 관련성을 규명한 논문으로 55년 MD(의사면허)를, 57년 PhD(의학박사)를 받았다.

60년대 초 뉴욕 마운트시나이병원 인턴 시절 그는 맨해튼 자기 아파트를 연구실로 활용했다. 신문 광고로 수면장애를 겪는 이들을 모았는데 유명 무용단 ‘로켓츠(Rockettes)’의 여성 단원들이 적극 응했다. 남자 집에 젊은 여성들이 정기적으로 몰려가 밤을 보내고 나오는 일을 두고 미심쩍어 한 이들도 있었다지만, 제자인 펠라요 교수에 따르면 “국립보건원(NIH)이 아파트 임대료의 절반을 댄” 엄연한 수면 연구였다. 고양이 개 신생아 등이 그의 연구 대상이었지만, 그 자신과 가족 심지어 이웃도 애써 설득해 실험ㆍ관찰에 동원하곤 했다. 그와 동료들은 맨해튼 연구를 통해 기면발작의 주요 메커니즘을 확인했다.

63년 스탠퍼드대에 자리를 얻은 그는 기숙사 등을 연구실로 쓰다가 70년 미국 최초 수면의학 전문 클리닉 겸 연구소를 설립했다. 기면발작의 세계적 권위자로 그와 함께 학술지 'Sleep'을 공동 창간한 프랑스 학자 크리스티앙 기유미노(Christian Guillemino, 1938~2019)를 비롯, 유수의 학자 및 연구자들이 스탠포드로 모여들었다.

"적정 수면시간은 더 잘 수 없을 때까지 자는 것이다"

잠은 왜 자고, 꿈은 왜 꾸는지 인류는 아직 온전히 알진 못한다. 하지만 건강한 잠은 어떠해야 하는지 뇌파와 체온 혈압 맥박 혈중산소농도 등 다원적 기준들을 통해 웬만큼 밝혀냈다. 그게 수면다원검사다. 연령대별 적정 수면시간도,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대체로 성인 기준 하루 7~9시간 정도로 수렴돼 왔다.(디멘트는 “더 잘 수 없을 때까지 자는 게 적정 시간”이란 입장이었다.)

수면의학자들은 수면부족및 장애가 혈압과 콜레스테롤을 높여 뇌 심혈관에 악영향을 끼치며, 비만과 2형당뇨 인지기능 저하와 우울증 등 정신과 질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혀왔다. 하지만 디멘트가 “미국인 약 20%가 수면무호흡 증상을 겪고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던 80년대 말 학계는 ‘그가 미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정도’였다. 디멘트의 판단은 오히려 보수적이었다.

디멘트는 대학 농구팀 선수들을 대상으로 수면량과 자유투 성공률 상관관계 등을 연구했고, 2002년엔 만 11일, 264시간 동안 잠을 안 자 기네스북에 오른 당시 고교생 랜디 가드너(Randy Gardner)를 관찰하며 새벽 3시에 베팅 야구 동전 게임을 무려 100회나 치르기도 했다. 만 74세의 그는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그는 10대의 에너지에 도전할 만큼 용감했다.

디멘트는 대중 강연에도 열성적이었다. 그에겐 자신의 연구 성과 못지않게 잠의 가치를 알리는 일을 중시했다. 88년 워싱턴 주 휘트먼대학 첫 대중강연을 앞두고 강연료 500달러를 몽땅 털어 신문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잠 자체를 사랑해서, 수면방추(sleep spindle, 2단계 깊은 수면 진입기에 나타나는 방추형 뇌파)의 "아름다운 파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기쁨을" 느낄 정도였다.(위 책)


"모든 게 그로부터 시작됐다"

‘엑슨 발데즈 사고’는 끔찍한 환경 재앙이었지만 수면의학계로선 도약의 계기였다. 92년 보고서 이후 연방정부는 NIH 산하에 국립수면장애연구센터를 발족, 새로운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본격 대응에 나섰다. 2003년 뉴저지 주 의회는 미국 최초로 졸음운전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그 해 미 ‘의대 교육 인증위원회(ACGME)’는 수련의 전공의 주당 근무시간을 80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규정을 채택했다. 연방 정부는 2003년과 04년 장거리 트럭 운전자 및 항공기 파일럿의 중간 휴식을 의무화했다.

95년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승객 1,500명을 태운 여객선 '스타 프린세스'호가 좌초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2,716만 달러의 재산 손실을 빚었다. 중형을 받을 처지였던 수로항해사는 만성 폐쇄성 수면무호흡증 진단을 받고 무죄(면허만 반납)로 풀려났다.

디멘트는 스탠퍼드의 전설이 된 '잠과 꿈' 강좌를 은퇴 후인 2015년까지 이어갔고, 강의를 제자에게 물려준 뒤에도 골프 카트 '잠과 꿈 셔틀'을 타고 등교해 청강했다. scopeblog.stanford.edu

‘수면의학의 아버지’는 여러 명이다. 디멘트는 1999년 세상을 뜬 스승 클라이트먼을 “수면의학을 창시한 분”이라고 칭송했고, 지난해 별세한 동료 기유미노를 두고는 “그가 세상을 바꾸었다"고 애도했다.

잠 연구는 주로 밤에 이뤄지고, 피험자를 24시간 관찰해야 할 때도 잦다. 디멘트도 ‘적색 경보’를 더러 무시했을 터였다. 자기 머리에 전극을 붙이고 '조수' 아내에게 적절한 시점에 깨우게 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나이가 든 뒤로는 잠을 충실히 챙겼다지만, 그의 수면 대차대조표는 썩 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2018년 수면무호흡증 진단을 받았고, 심장 질환으로 별세했다.

이제 동료와 제자들이 한 목소리로, 그를 ‘수면의학의 아버지’라고 애도하고 있다. 스탠퍼드 대 교수 에마뉘엘 미뇨(Emmanuel Mignot)는 “(수면의학의) 거의 모든 게 실은 빌로부터 시작됐다”고,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잠에 대해 무지했거나 적어도 10년은 늦게 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10년은 무수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브라운대 교수 메리 카스카던(Mary Carskadon)은 “아무도 잠에 관심을 두지 않던 그 황무지에서 디멘트 혼자 잠의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거의 혼자서 연구비를 타내고, 의회를 설득해 이만큼 오게 했다”고 말했다.

디멘트는 1928년 워싱턴 주에서 태어나 시카고대에 진학했고,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 주둔군 정훈병으로 파병돼 신문을 제작했고, 학부시절엔 수준급 베이시스트로서 퀸시 존스(Quincy Jones) 스탠 게츠(Stan Getz) 등과 잼세션을 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고만고만한 음악가보단 고만고만한 의사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공부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정년 퇴임하고도 2015년까지 ‘잠과 꿈’ 강의를 계속했다. 지금은 그 강좌를 제자 펠라요 교수가 이어가고 있다. 디멘트는 최근까지,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Sleep & Dreams Shuttle’이란 문구를 새긴 골프 카트를 타고 '등교'해 제자의 강의를 청강하며 때로는 끼어들고, 또 때로는 졸았다고 한다. 펠라요는 주저 없는 물총 세례로 스승의 잠을 재촉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