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묵묵]말과 폭탄 사이에서
[경향신문]
말을 믿을 수 없을 때, 말은 말일 뿐이라고 느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상엔 말뿐인 사람들만 넘쳐나고, 아무리 소리쳐도 말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8월 개봉 예정)을 보고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4~1975년 기업들에 폭탄테러를 가한 일본의 무장 운동 단체다.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던 미쓰비시중공업에서만 8명이 죽고 300명이 다쳤다. 언론은 이들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생각 없는 폭탄 마니아’라고도 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이후 일본 사회에서 누구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테러에는 현재의 상황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이들의 테러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 “미쓰비시는 전쟁 중에 조선 인민을 강제연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혹사시키고 학살했으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5000명 정도를 피폭시켰으면서도 보상도 하지 않은 채 지금도 한국에 경제침략을 하고 있는 일본의 핵심 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폭탄테러를 감행했던 다이도지 마사시의 말이다. 이들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한국의 대법원은 2018년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다).
반세기 전 일본 도심을 울린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폭탄
말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긴 싸움, 새로운 연루는 값지다
약 반세기 전 일본 도심에서 울린 폭발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들이 격렬한 윤리적 몸부림 속에서 던진 폭탄은 무언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폭탄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본 사회가 덮어버린 과거의 지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일본 기업과 일반 시민들의 책임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폭탄이 아니면 안 된다고. 이들은 ‘무고한 시민’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포함해 모두가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현재는 과거와 연루되어 있으며, 일본의 기업과 시민들의 풍요는 식민지 착취와 연루되어 있었다. 자신들은 ‘식민자의 후예’이며, 과거 제국주의를 주도하고 협력했던 관료와 기업들을 부활시킨 ‘제국주의 본국인’이라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이 인식으로 시작해야 한다.” 도심 게릴라전을 위한 ‘병사독본’의 첫 항목에 이들은 이렇게 적었다.
이들은 말에서 폭탄으로 곧바로 나아갔다. 진심이 없는 말들, 위력이 없는 말들만이 횡행했기 때문일까. 이들은 말로 떠드는 것, “그냥 왁자지껄하기만 한 운동”을 믿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폭탄과 청산가리만을 쥐고 있었다. 이들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써 자신의 반혁명을 청산"하려고 했다. 결국 각성의 말, 설득의 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과연 이 폭탄이 사람들을 깨웠던가. 몇몇 사람들은 깨어났지만 몇몇 사람들은 죽었다. 폭탄이 역사의 지층을 드러냈던가.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보았지만 많은 이들은 폭발의 잔해만을 보았고 고개를 곧바로 돌려버렸다. 그렇게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이 긴 시간 동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잔해들 사이로 진실한 말들이 들꽃처럼 자라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금기의 구역에 다가가 폭탄에 가려진 소중한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보살피고 가꾼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의 말을 받아 적고, 그것을 세상에 알린 ‘지원자들’이 있었다.
책임을 느낀다는 건 무얼까. 분명 그것은 자신의 연루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연루를 끝장내는 것으로 그것이 완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과제란 관계를 청산하는 폭탄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새로운 연루를 구축하는 말에 있는 게 아닐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지원자들을 보고 그것을 느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새로 연루된 사람들 말이다. 나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두 번째 투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긴 싸움에서, 아주 질기게 엮이고 널리 퍼져나가는 새로운 전선체를 보았다. 아이누인들과 오키나와인들, 일본 동북지역 주민들, 조선과 중국의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새로운 전선체 말이다.
말을 믿을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폭탄으로 달려가기 전에, 그리고 이미 폭탄이 터진 뒤에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말을 찾아야 하고, 그 말을 가꾸어야 하고, 그 말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말을 나누어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지원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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