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체육의 벽, 땜질 처방으로 넘을 수 있나
[경향신문]
가혹행위에 시달리던 젊은 운동선수가 숨졌다.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렸고, 도움을 호소했지만 구제받지 못했다. 체육계 폭력의 대물림 문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와 관련 기관은 기다렸다는 듯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촉구했다. 국회에서는 선수 이름을 딴 재발 방지법이 발의됐다. 주요 가해 혐의자가 여론의 표적이 됐다. ‘괴물’이 된 몇몇 가해자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지난 6월 26일 고 최숙현 선수가 숨진 이후 현재까지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예측 가능하다. 2019년 조재범 쇼트트랙 코치의 성폭력 사건을 따라가 보자. 조재범 사건이 터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체육계 만연한 폭력과 성폭력은 근본적으로 근절돼야 한다. 스포츠 분야의 성적 지상주의, 엘리트 체육 위주의 육성방식에 대해 전면 재검토하고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감독과 코치, 선임, 심지어 자격증 없는 팀 닥터에게도 부여되는 ‘위력’은 엘리트 선수 육성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모두 7개 기관에 도움 청한 최 선수
이내 시스템 개혁을 위한 위원회와 기구가 설립된다. 조재범 사건 이후 스포츠 혁신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 인권특별조사단이 출범했다. 이에 따라 개혁안이 마련되고 인권실태조사 결과도 나온다. 개혁안의 골자는 엘리트 체육 축소와 생활·학교체육 확대다. 개혁안을 놓고 엘리트 체육계가 반발한다. 대한체육회를 필두로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 국회에 포진한 엘리트 체육인들이 힘을 보탠다. 그 사이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개혁안은 적당한 선에서 협의되고 타결된다. 조재범 사건 이후 후속 조치는 체육계 개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를까.
최숙현 선수는 국가인권위원회·검찰·경찰·경주시·대한체육회 7곳에 도움을 청했지만 이들 기관 모두 최 선수를 보호하지 못했다. 이 가운데 인권위에는 최 선수 측이 두 차례나 손을 내밀었다. 지난 2월 인권위에 진정을 넣은 최 선수 가족은 6월 25일 인권위에 재진정을 넣었다. 하지만 다음날 최 선수는 세상을 떠났다.
최 선수는 왜 인권위에 기대를 걸었을까. 인권위는 조재범 사건 이후 자체적인 ‘스포츠인권 특별조사단’을 꾸렸다. 당시 인권위는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선수 13만 명을 대상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실태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최 선수를 비롯한 스포츠 선수들은 수사기관과 체육회 등을 통해서는 성폭력·폭력 피해를 제대로 구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전직 운동선수 ㄱ씨(현 실업팀 코치)는 “인권위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하면서 도와준다고 하니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며 “아마 최 선수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인권위에 도움을 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권위의 역할은 한계가 있었다. 인권위 조사는 기존에 신고가 이뤄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소극적으로 진행됐다. 새로운 피해 사례를 발굴하거나 선수들의 신고를 유도하기보다는 기존 시스템을 점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게다가 최 선수는 절차상 이유로 인권위의 구제 절차를 밟지 못했다. 최 선수 측은 최초 인권위 진정 이후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진정을 취하했다.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상 수사 중이거나 수사기관의 권리구제 절차가 진행 중인 경우 진정은 각하된다.
신고가 정상적으로 접수됐다 하더라도 최 선수가 인권위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특조단에 접수된 스포츠 분야 폭력·성폭력 사건은 163건이다. 이 가운데 구제조치되거나 해결된 사건은 38건에 불과하다.
개선안 권고를 둘러싼 인권위의 ‘갈팡질팡’ 행보를 두고도 뒷말이 나온다. 당초 인권위는 지난해 11월 실업팀 직장운동선수 인권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한 뒤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국가기관에 권고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권위는 ‘코로나19 확산’ 등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권고하지 않았다. 최 선수가 사망한 뒤에야 인권위는 ‘스포츠 폭력 근절을 위해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줄 것’을 뒤늦게 권고했다.
인권위 갈팡질팡 행보 논란
35개 인권·시민단체들은 인권위가 최 선수의 사망 사고 전 정부 눈치보기를 하느라 개선안 권고를 의도적으로 연기해 책임을 방기했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정무적 판단에 따라 전원위 결정으로 도출된 권고안을 의견 표명으로 수위를 한 단계 낮추려 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명숙 상임활동가는 “인권위에서는 ‘위원장 모르게 실무진이 권고를 미루고 의견 표명으로 조정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납득이 안 가는 해명”이라며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인권위가 정부 눈치를 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 측은 “대통령에게 체육계 병폐 해결을 위해 인권위를 활용하라는 내용을 담은 요청이기 때문에 권고보다는 의견 표명 형식이 맞다고 판단했다”며 “정무적인 판단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15일 인권위는 ‘독립적 국가기구인 인권위가 체육계 인권침해 전문 조사기구로 지정돼야 한다’는 취지의 권고안을 추가로 발표했다. 한시적 운영을 전제로 구성한 인권위의 내부 특조단을 상설기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체육계 인권침해 사건을 다룰 전문 상설기관은 스포츠윤리센터와 인권위의 특조단 2개가 된다. 정용철 서강대 스포츠심리학 교수는 “인권위 입장에서는 조직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겠지만, 체육계에서 보기엔 이제 출범하는 윤리센터의 힘을 빼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며 “윤리센터에 힘을 실어주고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스포츠윤리센터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다음달 출범 예정인 스포츠윤리센터는 수사권과 조사 강제 권한이 없는 기구다. 최 선수 사망 이후 문제가 커지자 문체부는 특별사법경찰제도를 도입한다는 방침을 내놨지만 이를 위해선 사법경찰직무법을 개정해야 한다. 당초 스포츠혁신위는 스포츠윤리센터를 독립성과 수사 기능을 갖춘 기구로 설계했다. 하지만 윤리센터 설립의 근거가 되는 ‘운동선수 보호법’이 통과되고 센터가 설립하는 과정에서 ‘반쪽짜리’가 됐다. 스포츠혁신위 활동을 했던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는 “윤리센터 구성 과정에서 문체부가 센터의 권한과 기능을 축소시켰다”며 “완전히 다시 설계해야 제 기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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