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성폭력 간부 또 모시라니"..임실의 비극
"과거 성폭력 피해를 본 간부와 함께 일하게 돼 힘들 것 같다"
해당 간부들 "사실 아니다" vs 유족 "목숨 끊어 성폭행 증명"
(시사저널=호남취재본부 정성환 기자)
7월 16일 낮 전북 임실군청, 인근 식당 등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군청 청사 안으로 들어가는 직원들의 표정은 착잡함이 역력했다.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걷던 일부 직원들은 취재 차량을 발견하자 힐끔 쳐다보며 동태를 살피기도 했다. 이날 모처럼 장맛비가 그쳐 햇볕이 쨍쨍한 화창한 날씨였지만 청사 뒤편의 주차장은 평소와 달리 빈자리가 많아서인지 을씨년스러웠다. 활력도 잃어 보였다. 하지만 청사 안 분위기는 내부 리스크가 곪아 터진 비극으로 평온치 않았다. 최근 군청 소속 팀장급 여성공무원이 과거 상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군청이 발칵 뒤집혔다.
女공무원, 죽음으로 성폭력 호소에 군청·지역사회 '발칵'
임실군 등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후 5시 30분께 임실군청 공무원 A씨(49)는 임실읍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혼 후 두 자녀와 떨어져 혼자 지내온 것으로 알려진 A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4개월가량 질병휴가를 낸 뒤, 3월 초 복직해 산업건설국 상하수도과 팀장급으로 근무했다. 문제의 상황은 최근 인사로 이달 초부터 산업건설국 간부들이 바뀌면서 벌어졌다.
A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예고하는 전조를 보였다. 군청 인사담당자와 친척뻘인 지인에게 각각 문자메시지를 보내 괴로운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사망 하루 전인 지난 10일 지인에게 "최근 정기 인사이동으로 과거 자신에게 성폭력을 휘두른 상사와 앞으로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돼 힘들 것 같다"는 문자를 보냈다. 특히 "대리운전을 시켜 집에 데려다준다고 해서 차에 탔는데 갑자기 짐승으로 돌변했다.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에서 도망 나왔다. 그 사람을 다시 국장으로 모셔야 하니까 싫다"는 내용도 적었다.
A씨 지인은 문자 메시지를 받은 뒤 A씨가 사는 아파트로 찾아갔으나 문이 잠겨 있고 전화 연락도 되지 않자 경찰에 신고했다. 고인은 숨지기 사흘 전인 지난 8일에는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임실군 인사 담당 과장에게도 보냈다. 임실군 행정지원과 관계자는 "성폭력을 한 국장, 과장과 어떻게 근무할 수 있겠느냐고 하소연 하는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다만 두 메시지 모두 성폭력 일시·장소는 문자에 나와 있지 않다.
지목된 국장 "억울해…가장 명예 바닥에 떨어져"
지금 임실군청 안팎의 화두는 단연 '군청 간부 연루설'이다. A씨가 남긴 문자메시지에 자신의 상관인 국·과장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국장'은 B씨다. 가해 당사자로 지목된 B국장은 범행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는 이날 오후 시사저널과 만난 자리에서 "매우 당황스럽고 억울하다. 가족이 있는 가장으로서 명예가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 고인과 한 사무실에 근무하거나 상하 관계로 같은 조직에 몸담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술자리는 물론 식사를 한 적도 없다"며 "자신이 가해자로 지목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또한 B국장은 "30여년 전 신덕면사무소에서 3개월 간 함께 근무한 적 밖에 없는 여직원이 성폭력을 당했다며 극단적 선택을 했으니 경찰 수사로 결백함이 밝혀지길 바랄뿐이다"면서 "영문도 모른 채 고인의 장례식에 조문을 다녀왔는데 13일 무렵 인사부서에서 사실여부를 타진해와 뒤늦게 자신이 사고와 연루 사실을 알게 돼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경찰, 휴대전화 포렌식 등 내사 착수
이처럼 가해 당사자로 지목된 간부 공무원이 범행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어 경찰 수사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경찰은 아직 유족 고소장이 접수되지 않아 내사 중이다. 임실경찰서는 A씨 휴대전화에 대한 디지털포렌식을 진행하는 등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휴대전화 통화 기록 등을 통해 A씨 사망과 성폭행 피해의 인과관계를 살펴보겠다는 취지다. 경찰 관계자는 "문자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며 "유족과 지인 등을 상대로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임실군 간부들의 범죄 혐의가 드러나면 정식 수사로 전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A씨가 남긴 문자에는 성폭력 일시·장소 등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는데다 현재까지 소문만 무성할 뿐 뚜렷한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수사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날 평소 활달했던 것으로 알려진 팀장급 여성공무원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군민과 공무원들의 시선은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임실군을 찾았다. 먼저 사건의 진원지인 임실군청을 찾았다. 군청 공무원들은 "수사가 어떻게 되는 거냐"며 내심 긴장하면서도 '겉으로는 맡은 일만 하자'는 분위기였다. 군청 한 공무원은 "극단적 선택을 한 고인에 대한 추모 분위기이지만 군청이 가해자 색출에 나서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로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며 "다들 쉬쉬하며 경찰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을 아꼈다.
임실군은 자체조사를 통해 메시지 상의 가해자를 찾고 있으나 B국장 등에게서 의심할만한 정황을 파악하지 못해 난감해하는 상황이다. 군청 감사부서 관계자는 "이번 일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곤혹스럽다. 경찰의 내사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며 "비교적 순항하던 민선 7기 군정이 반환점을 돈 시기에 돌발 악재가 튀어 나왔다"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군청 밖에서 만난 주민들은 공무원들과는 온도 차를 보였다. 임실 읍내 카페에서 지인들과 모임을 갖고 있던 한 주민(여·34)은 "경찰 내사 결과를 떠나 성 비위 사건에 군청 간부들 이름이 거론되고 A씨가 세상을 떠나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군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며 "임실군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얼굴을 붉혔다. 농협 농자재센터에서 만난 다른 주민(남·56)은 "임실군이 고인이 우울증 등 지병으로 휴직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언론에 밝힘으로써 2차 가해를 하는 것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며 "앞으로 피해자 보호를 위해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고 꼬집었다.
'매뉴얼대로만 했더라면'…때늦은 탄식
유족들은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혀 고인의 명예를 회복해 줄 것을 경찰에 요구했다. 유족 측은 "고인은 성폭행 피해 사실 때문에 너무 힘들고 창피해 직장을 다닐 수 없다는 것을 목숨을 끊어가며 증명했다"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게 사실이냐"고 반문하며 숨진 A씨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이렇듯 이날 만난 여러 사람들의 얘기는 제각각이다. 다만 경찰 내사 결과에 상관없이 군민들은 이미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과 피해자 중심으로 사안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시각은 지배적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관가 주변에선 군의 대응이 '아쉽다'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문자 메시지를 접한 군청 인사부서가 매뉴얼대로 군 여성청소년과 고충민원 담당자에게 A팀장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호소 사실을 알리고 신속하게 대응했더라면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텐 데라는 장탄식이다. 하지만 이미 때늦은 뒤였다.
전북여성단체연합과 성폭력예방치료센터 등 여성단체는 17일 오전 전북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실군은 피해자를 우울증 탓으로 몰지 말고즉각 자체 진상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단체는 "사망하기 전 지인에게 남긴 문자 등을 보면 피해자는 인사 담당 과장에게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우울증이 돌아왔다'는 식의 답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피해자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줬다면 극단적 선택을 막았을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또 "가해 용의자는 1992년에 3개월간 피해자와 근무한 것 외에 접점이 없다고 하지만 28년 전 피해자가 성폭력을 당했을 수도 있다"며 "성폭력 처벌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지도 않았던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피해자는 피해를 보고도 밝히지 못한 채 오랜 시간 혼자서 괴로워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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