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건향상 및 예방의학 이끈 권이혁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종합)
[경향신문]
■전 문교부, 환경처, 보건사회부 장관 등 역임…국가보건체계의 확립과 국민보건향상에 크게 공헌
→“모든 과학이 그렇지만 특히 예방의학은 삶의 질과 직결해 있다. 예방의학은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의 실제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한다. 개인과 더불어 집단, 국제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지구에 대한 건강진단도 예방의학의 영역이다.” (권이혁, <예방의학의 과거와 미래>, 대한예방의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129쪽)
우리나라 보건향상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국 예방의학의 개척자, 우강(又岡) 권이혁 박사(서울대 명예교수)가 12일 오전 별세했다. 잠이 든 상태에서 고이 소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향년 97세.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에서 1923년 7월 13일 태어난 고인은 1947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1회)하고 1948년 서울대 수의과대학 전임강사, 1956년 서울대 의과대학 조교수로 강단에 섰다. 1970년 서울대 의과대학장, 1979년 서울대병원장을 거쳐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했다. 이어 1983년에는 문교부 장관을, 1988년에는 보건사회부 장관을, 1991년에는 환경처 장관을 역임했다. 또한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성균관대학교 이사장, 한국의약사평론가회장, 국제보건의료발전재단 이사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학술 진흥과 보건의학계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보건·의학계열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6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특별공로상, 2006년 제3회 서재필의학상, 2019년 대한의학회 의학공헌상 외에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미국자유훈장, 3.1문화상, 보건대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와 아들 윤택, 딸 성택, 송택씨가 있다. 빈소는 12일에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4호실에 마련될 예정이며, 13일부터는 1호실로 옮겨질 예정이다. 발인은 14일 오전 10시다.
고인은 국민건강을 위한 우리나라의 보건학을 정립하였고, 우리나라의 의학교육체제를 수립했다. 1960년대부터 도시인구, 영세민·저소득층 인구, 시각장애인, 소아인구, 노인인구, 임산부 인구 등을 연구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한국형 보건학을 정립했다. 저서 <최신보건학>은 1982년 대한민국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했다. 서울대 의대 학장이었던 1970년 초에 개발, 개편한 의학교육 체제는 한국 의학이 연구와 교육·인력양성에 있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서울대총장에 이어 3개 부처 장관까지 역임한 한국의 보건의료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권이혁 박사의 제자인 신영수 전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은 “고인은 우리나라 보건의료제도의 기초를 만드는 데에 기여한 대표적 학자이자 행정가였다”고 평가했다. 박병주 대한보건협회장(서울대 의대 예방의학 교수)은 “우리나라 보건학의 기틀을 놓으셨다”고 밝혔다. 권이혁 박사의 모교인 서울대 의대 신찬수 학장은 “고인은 우리나라 의학교육체제를 수립하여 국민의 건강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 교실의 후학들인 안윤옥 서울대 명예교수(대한암협회장, 의대 교무부학장 등 역임), 유근영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립암센터장·국국수도병원장), 그리고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 교실 강영호 주임교수 등은 “항상 새로운 비전과 새 길을 만드신 대한민국 보건의학계의 거목”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백과’를 보면, 권이혁 박사(이하 권이혁)는 그의 아호 우강(又岡)처럼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언덕을 넘듯 예방의학자로서 책무를 다했다. 한국인의 건강을 책임진 보건전문가, 의학교육의 새 지평을 연 교육행정가, 더 나은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정책 책임가로 건강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헌신했다.
→“의과대학은 의사를 배출할 뿐만 아니라 대학의 본래 기능인 진리탐구와 연구를 담당하고 지식을 보존 개발하는 의학자를 확보할 중대한 사명이 있다.” (권이혁, <또하나의 언덕>, 192쪽)
1955년 9월 권이혁은 미네소타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행정의 대가로 유명한 앤더슨 교수의 지도 아래 보건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앤더슨 교수는 석사과정이 끝나가는 권이혁에게 미네소타대학에 남아 박사과정을 이어가라고 제안했다. 가족의 미국 생활 지원도 포함한 파격 제안이었지만 한국의 의과대학에서 교직을 갖고 싶었던 권이혁은 귀국을 선택했다.
1956년 12월 권이혁은 서울의대 조교수로 부임해 예방의학론과 전염병관리를 전담해 가르쳤다. 1955년부터 서울대는 의대·공대·농대 발전을 위해 미네소타대학과 교류하는 프로젝트를 운영했다. 그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갈고닦은 행정 기량을 발휘해 본격적으로 보건대학원 설치를 추진, 1959년 5월 2일 한국 최초 8개의 보건학 전공을 갖춘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이 설립됐다.
1970년 서울의대 학장에 취임한 권이혁은 일제강점기 교육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의과대학 체계를 대폭 개편해서 선진 의료인을 양성하는 교육과정을 추진했다. 1971년 ‘의학은 하나’라는 기치 아래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통합해서 교육하는 통합교과목(block lecture) 방식을 채택했다. 1975년 기성 보건의료인의 자기 계발을 고양하기 위해 교수훈련과 교육연구를 지원하는 의학교육연수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을 겸임했다. 그가 시도한 의학교육 체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의과대학이 도입해서 따르고 있으며, 한국 의학이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됐다. 1979년 서울대병원장에 취임, 병원의 법인 전환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초석을 놓았다.
1983년 10월 권이혁은 문교부 장관에 임명됐다. 암기 위주 입시에서 벗어나 수험생의 고차원적 사고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대학 입시에 논술 고사를 도입했다. 장관 재임 시절 가장 예민한 문제는 민주화운동으로 학교를 떠난 제적대학생 복학과 해직교수 복직이었다. 그는 1980~83년 서울대 총장 재임 때와 마찬가지로 대학의 자율성과 학원 안정화를 위해 정치가 아닌 교육적 차원에서 대처했다.
1985년 3월 권이혁은 미래사회를 위한 교육개혁과 교원교육의 질적 고도화를 위해 신설한 한국교원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교원 양성·연수·연구를 포괄한 종합교육기관을 구축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1988년 2월 권이혁은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장관 취임 이후 비소 오염 콩나물, 가짜 참기름 등의 부정식품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는 부정식품을 집단 살인행위로 규정하고 강경 대책을 마련했다. 부정식품 특별기동감시반을 편성해서 감시기능을 강화했고 위생감시원을 지방별정직으로 양성화해서 조사원의 자질을 높였다.
1991년 4월 권이혁은 환경처 장관으로 입각했다. 낙동강 페놀오염사건 직후 환경대책이 절박한 시기에 취임한 까닭에 질타와 비난이 빗발치는 험난한 자리였다. 재임 당시 최대 난제는 지방자치제 실시와 님비현상 때문에 난항을 거듭한 수도권 해안매립지 설치였다. 그는 지역주민의 의견을 진정성 있는 자세로 수용하고 충분한 협의를 거쳐 영향권 주민의 80% 이상 동의를 얻어 설치에 성공했다. 그가 보여준 사회적 혐오시설의 우호적 설치 과정은 환경행정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권이혁은 환경처 장관에서 물러난 후 다양한 기관의 수장을 맡아 과학기술인의 권익신장과 과학기술진흥에 공헌했다.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1990년)으로 취임해서 과학기술회관 건립을 추진했고, 학술원 원장(1992년)으로 부임한 후 상조회를 신설해서 원로 과학기술인에 대한 예우를 갖췄다. 1990년 남북 민간과학기술교류협의회를 창립해서 남북과학기술교류의 물꼬를 텄다.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2대 총재로 취임해서 결핵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박효순 기자 anyto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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