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삶을 뒤흔든 '숲속 커다란 집'

최재봉 2020. 7. 1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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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간첩조작사건 다룬 손보미 소설 '작은 동네'
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문학과지성사·1만4000원
두 번째 장편소설 <작은 동네>를 내고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을 찾은 손보미 작가. “여성 화자의 일인칭 소설은 써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여성 일인칭 화자를 시도해 보았다. 나 자신의 경험도 약간 들어 있고, 여러 모로 나한테는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엄마에게는 지상과제가 하나 있었다. 외동딸을 안전하게 키우는 것. 5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동네에서 가족은 이웃과 교류가 거의 없이 지냈다. 담장 위로 “높게 쌓아올린 벽돌”과 “항상 굳게 잠가놓은 대문”은 동네 사람들에게 명백한 거부의 뜻을 전했다. 아이는 친구가 없이 자랐고 엄마는 딸을 직접 학교까지 데려갔고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손보미의 장편소설 <작은 동네>는 경기도 광주의 외딴 동네를 배경으로 삼는다. 일곱 살부터 열한 살 때까지 ‘나’가 부모님과 그 동네에서 살았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이제 어른이 된 ‘나’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시절을 돌이켜 보는 현재의 이야기가 보조적 구실을 한다. ‘나’가 열한 살 때 가족을 떠나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 뒤 해줄 이야기가 있다며 연락을 취해 온 일이 새삼 옛일을 돌이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어린 딸에게 엄마는 말했다. 언젠가 동네에 큰 불이 났고 “그래서 사람들은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고, 그때 너의 오빠도 죽었다고”. 그러나 엄마가 죽은 뒤에 다시 만난 아버지는 그것이 거짓말이었다고 말한다. “네 엄마는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다. 너를 보호하려고. 아마도 그랬을 거다.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한 걸 거다.” 어머니가 딸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해야 했는지, 소설은 수십 년의 세월을 오가며 묻혀 있던 비밀의 실체를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친구가 없는 아이는 옆집 할머니가 홀로 키우는 개를 친구로 삼는다. “손상된 육체의 현현”과도 같았던 할머니는 주름과 탁한 목소리로 늙음의 경악할 만한 실체를 알려준다. 그럼에도 그 할머니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아이를 위해 “먼지 쌓인 툇마루 위에 사탕과 초콜릿, 캐러멜 같은 간식거리”를 올려놓기도 한다. 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반 아이들 모두가 피하는 더럽고 냄새 나는 급우에게 부러 친절하게 굴고, 단소 연주에서 재능을 발휘하는가 하면 시내 백화점 수영장에 다니며 수영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딸의 안전을 염려하는 엄마의 감시와 규제는 결코 느슨해지지 않는다. “나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싶었다.”

참다 못한 아이는 ‘실종’될 계획을 세운다. 열아홉 살 나이에 가족들 몰래 섬을 떠나 독립했던 엄마처럼, 아이는 짐을 챙겨 외지로 나가는 버스에 오르지만 이내 포기하고 대신 동네 안쪽의 안 가 본 소나무숲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가 길을 잃고 넘어져 다치기까지 한 상태에서 “숲 한가운데의 커다란 집”을 발견하고 초인종을 눌러 구조를 요청한다.

“그건 마치 하나의 꿈, 연속적이지 않아서 하나의 장면으로 제대로 엮기조차 어려운, 조각난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그날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이 그랬다.”

비현실적인 꿈처럼 모호하고 파편적이었던 그날의 모험은 ‘나’의 삶을 돌이킬 수 없도록 바꾸어 놓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애써 묻어 놓았던 비밀이 결국 파헤쳐지는 계기가 된다. 숲 한가운데 별장에는 “유력 정치인의 내연녀가 되어 두 번이나 낙태를 해야 했”던 연예인이 감금당하다시피 지내고 있었고, 딸의 일을 계기로 엄마는 그 여자와 가깝게 어울리곤 했는데, 결국 그이가 자살한 뒤 경찰이 집에까지 찾아오게 된다. “경찰이 우리 집을 들락날락하게 만들다니, 당신 정말 미쳤어. (…) 우린 실패한 거야.” 이런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집을 떠났던 것.

“부모님은 매일 거의 빠짐없이 뉴스를 챙겨보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신문을 구독했다.” 그러면서도 딸이 그 신문들을 읽는 일만은 엄격히 금했다. 이제 어른이 된 ‘나’의 남편은 연예 기획사에 다니는 사람인데,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찢어서 스크랩북에 정리를 해둔다. 남편의 스크랩북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사를 통해 ‘나’는 엄마가 떠나온 고향 섬에서 1970년대에 있었던 어부 간첩 조작 사건에 관해 알게 된다. 어머니는 그 사람들을 알고 있었을까, 라고 남편에게 말하자 남편은 이렇게 대답한다.

“여보, 그걸 특정한 사람들만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 돼. 그건 우리 모두가 겪은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마찬가지’라고 말할 때만 해도 남편과 ‘나’에게는 그 사건으로부터 안전한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 사건은 어머니는 물론 ‘나’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일이었음이 드러난다. “아마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그때가 어떤 시절이었는지”라고, 나중에 만난 아버지는 말하는데, 상상도 못 할 일이 결국 어머니와 ‘나’의 삶을 규정했다. 동네가 불에 탄 것은 아니지만, 오빠는 실제로 죽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 작은 동네를 떠난 후에도,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 작은 동네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네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나를 붙잡거나 밀어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안다.”

<작은 동네>는 손보미의 2017년 첫 장편 <디어 랄프 로렌>과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인다.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손 작가는 “몇 년 전 어부 간첩 조작 사건에 관한 기사를 우연히 접하고, 언젠가 내가 소설을 잘 쓰게 된다면 이런 이야기를 다뤄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애꿎게 간첩으로 몰려 수십 년 간 옥살이를 하고 그 아들은 자살까지 했다는 기사를 보며 즉각적으로 비극적이고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느낌을 계속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그 일을 겪은 당사자가 아닌데 이렇게 쉽게 슬픔을 느끼고 소설로 써도 되나 싶은 조심스러움이 있다”고도 덧붙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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