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는 왜 저주해 마지않던 녹색 유니폼을 입었을까
얼마 전 미국에서 백인 경찰이 흑인의 목을 무릎으로 누른 끝에 절명시키는 사태가 일어나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인종차별 반대 시위로 들끓고 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할망정 최소한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대의를 대놓고 거부하는 나라는 없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의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박탈하고 심지어 다른 인종과의 결혼이나 교제까지도 금기시했던 나라가 지구상에 실재했다. 그게 남아프리카공화국이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수십 년간 고수했어.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 백인들이 쓰는 보어 말로 ‘분리’라는 뜻이야.
1960년 3월21일, 샤프빌이라는 도시의 경찰서 앞에 흑인들이 모여들었어. 남아공 정부는 흑인들의 거주지와 통행의 자유를 제한하고 흑인들에게 통행증명서를 항상 가지고 다니도록 했는데 여기에 항의해 통행증을 반납하는, 일종의 불복종을 선언하는 시위였지. 하지만 경찰은 총을 쏘고 기관총까지 불을 뿜었어. 무려 흑인 69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은 대개 등이나 뒤통수에 총을 맞았단다. 즉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사냥하듯 총알을 퍼부었던 거야.
남아공 흑인들에게 샤프빌 학살은 우리나라의 ‘광주’처럼 역사적 분기점이었어. 샤프빌 학살 당시 마흔두 살이던 변호사 넬슨 만델라에게도 그랬다. 만델라는 그때까지 지켜온 비폭력 노선을 버리고 무장투쟁 준비에 나선다. ‘움콘트 웨 시즈웨(민족의 창)’라고 하는 군사 조직을 만들어 최초의 사령관이 된 그는 아프리카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군사훈련도 받고 게릴라 전술도 연구하며 무장투쟁의 토대를 다진다. 1962년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범아프리카 회의에서 ‘민족의 창’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지.
남아공 정부가 이런 눈엣가시를 그대로 둘 리 없었어. 만델라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무려 27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1990년 그가 석방될 무렵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어. 남아공의 백인 정부도 더 이상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통해 흑인들을 지배하기란 불가능하며 백인들의 특권을 유지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던 거야. 당시 남아공 대통령이던 클레르크는 만델라를 석방하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비롯한 저항 단체들을 합법화하고, 출생과 동시에 인종을 분리해왔던 인구등록법, 인종별로 거주지와 영업 지역을 제한한 집단거주지법, 국토의 87%를 백인 소유로 만든 토지법 등 인종차별 3대 악법을 철폐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뜨린다. 1994년 모든 인종이 참가한 총선이 실시됐고, 선거에서 승리한 ANC의 지도자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어.
하지만 거의 ‘신생’이라 할 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 앞에 놓인 과제는 너무나도 많았단다. 수십 년 동안 아파르트헤이트 아래 특권을 누려온 백인들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고 흑인들끼리의 종족 갈등도 상상 이상으로 험악했으며 무엇보다 백인 정권 시절 저질러졌던 비인간적 범죄들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됐지. ‘역사 바로세우기’의 과제에서 만델라는 이스라엘의 유대인학살 기념관 입구의 문구를 재활용한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라.”
만델라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백인들의 역량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신념을 위해 ‘정의의 응징’이 주는 통쾌함을 사실상 포기했다. ‘진실과화해위원회(TRC)’는 백인 정권하에서 자행된 수많은 인권유린 범죄를 밝혀냈지만 가해자들이 진실을 밝힐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 거야.
당연하게도 만델라는 적잖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한때 백인 정부가 과학자들을 동원해 흑인만 선별적으로 죽일 수 있는 특수 박테리아 등 생물화학무기를 만들려 했다는 증언까지 나오는 마당에 그 음모를 꾸민 이들조차 처벌되지 않는다면 대체 정의는 어디 있느냐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만델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롭게 선 나라가 깨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어. 자신들이 한 짓이 있는 만큼 불안과 긴장에 싸여 있던 백인들에게 만델라는 자신이 어떤 나라를 꿈꾸는지 진솔하게 드러낼 기회를 잡는다.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이었어.
흑인의 저항가요가 럭비 팀 응원가로
남아공의 흑인들은 축구를 즐긴 반면 백인들은 럭비에 열광했다. 남아공에 서식하는 산양에서 이름을 딴 ‘스프링복스(Springboks)’의 녹색 유니폼은 흑인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어. 즉 럭비는 가해자의 스포츠이자 수많은 피압박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스포츠였던 거야. 럭비 팀은 흑인 선수 단 한 명을 빼고 나머지는 당연히 백인 일색이었지.
만델라는 이 럭비 팀을 흑백 화해의 상징으로 내세웠어. 백인 선수들은 흑인들의 국가(남아공은 흑백의 국가조차 달랐다고 해)를 배웠고 만델라가 수감 생활을 한 로벤섬 감방을 방문했단다. 또 흑인 마을에 가서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럭비를 가르쳐주는 시간을 갖도록 했지. 스포츠의 힘은 놀라웠어. 흑인들의 저항가요 ‘응코시 시키렐레’가 스프링복스의 응원가가 됐고 만델라는 흑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녹색의 유니폼, 스프링복스의 옷을 입고 럭비 월드컵 경기장에 나타났단다.
흑백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스프링복스는 결승전에 진출했어. 상대는 뉴질랜드. 뉴질랜드 대표팀에는 넬슨 만델라마저 “저 괴물을 어떻게 막나”라고 탄식하게 했던 슈퍼스타, 조나 로무가 있었지. 하지만 스프링복스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어.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남아공은 기어코 우승을 차지하고야 말았다. 선수들은 미친 듯이 환호하며 펄쩍펄쩍 뛰다가 갑자기 둥근 원을 그리며 모여들었어. 누군가 기쁨에 넘쳐 원을 벗어나려고 하면 뒷덜미를 잡아 제지하면서까지 머리를 맞댄 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시작된 기도. 흑인 한 명 외에는 모두 백인이었던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어. 그때 그들은 뭐라고 기도했을까. 경기장에는 새로 지정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육색 깃발이 춤을 추었고 6만 관중은 ‘넬슨 넬슨’을 부르짖는다. 당연히 그 관중의 대부분은 백인이었지.
만델라는 그 경기를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었어. 아니 그 이전, 흑인들에게 증오의 상징이던 스프링복스 유니폼을 입는 순간, 아니 그전에 백인들의 스포츠인 럭비를 남아공을 묶는 매개로 사용한 순간, 그리고 월드컵 1년 전 스프링복스의 주장 프랑수아 피나르를 불러 “반드시 우승해달라”고 호소하던 순간을 통해서 말이다.
만델라의 선택이 항상 올바른 것도 아니었고, 그의 ‘진실과 화해’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만델라의 리더십이, 야만적인 지배에 수십 년간 시달린 뒤 위태롭게 출발하는 나라에서 든든한 발돋움판이 됐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구나. 그의 취임 연설 중 일부를 새삼 읊조린다. “우리는 조국의 조화, 재건과 새로운 세계의 협동을 위해 반드시 협력해야 합니다. (중략) 우리 각자의 육체와 영혼이 이미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소서. 이제 우리가 다시는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모욕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김형민(SBS CNBC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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