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시베리아'가 몰고 올 재앙의 서막

이정호 기자 2020. 6. 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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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동토층이 녹고 있다'
러시아 발전소 기름 유출
사고 원인에 주목할 이유

[경향신문]

폭이 족히 수백m는 돼 보이는 넓은 강을 가로질러 설치된 오일펜스가 물의 흐름을 힘겹게 막아서고 있다. 물살을 못 이겨 둥글게 구부러진 오일펜스 안쪽을 보니 뭔지 모를 연한 ‘붉은 액체’가 수면을 뒤덮고 있다. 방재대원들은 펌프로 퍼올린 붉은 액체를 커다란 수조에 담아 강물과 분리하는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러시아 시베리아 도시인 노릴스크에서 대규모 경유 유출 사고가 일어난 직후 긴급히 전개된 방재 작업의 한 장면이다. 붉은 액체는 당시 유출된 경유다. 경유는 이 지역의 열병합발전소에서 연료저장고가 파괴되며 유출됐는데, 모두 2만1000t에 달한다. 이 가운데 6000t은 주변 땅으로 스며들었고 1만5000t은 발전소 주변의 암바르나야강으로 흘러들었다.

사고가 일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수습에 나섰다. 방재인력이 대거 동원되지만 기름 유출 사고의 특성상 생태계를 빠른 시일 안에 원래대로 돌려놓는 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린피스 등 환경단체는 이번 일을 북극권 최대의 기름 유출 사고로 평가하고 있다.

주목되는 건 사고의 원인이다. 연료저장고 주변의 지반이 침하하면서 저장고가 부서졌고, 이 때문에 내부에 있던 경유가 다량 유출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현지에서 나오고 있다.

노릴스크의 열병합발전소 연료저장고에 대한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지반 침하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건 ‘영구동토층’의 해빙이다. 원래 시베리아의 땅 대부분은 1년 동안 토양 온도가 0도 이하로 유지되는 영구동토층인데 여기에 기둥을 박고 서 있던 연료저장고가 무너질 정도라면 영구동토층 내부가 예전처럼 단단하지 않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영구동토층은 지면과 가까운 표층을 빼고는 땅속 대부분이 그야말로 꽁꽁 언 얼음과 같은 상태인 것이 정상이다.

영구동토층의 해체는 냉동 상태를 유지하는 동력인 ‘낮은 기온’이 최근 들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북극권 도시인 카탕가에선 지난달 22일 낮 기온이 25도를 기록했는데, 예년 평균 6도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였다. 이전까지 최고 기록은 12도에 불과했다. 니즈야야 페샤라는 도시에선 이달 9일 기온이 30도까지 치솟았다. 북극이 코앞인 곳인데도 훨씬 저위도인 한국의 서울 날씨와 별 차이가 없는 더위가 나타난 것이다.

‘뜨거운 시베리아’라는 이상 현상은 또 다른 수치에서도 확인된다. 유럽연합(EU)이 운영하는 과학기구인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 서비스’에 따르면 지난달 일부 시베리아 지역의 기온이 평년보다 10도나 높았다.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 서비스의 선임과학자 프레자 밤보르크 박사는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놀라운 현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유독 지난달에만 두드러진 현상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기상청 소속 수석과학자 마리나 마카로바 박사도 “지난겨울 시베리아는 130년 전 기상 측정이 시작된 이래 가장 더웠다”며 “평년보다 6도가 높았다”고 설명했다.

암바르나야강으로 흘러들어간 경유를 방재대원들이 수조에 옮겨담고 있다. EPA연합뉴스

문제는 녹아내리는 영구동토층으로 인한 본격적인 재앙은 이제 막 시작됐다는 점이다. 더위가 지속되면서 인류가 영구동토층 위에 건설한 각종 구조물의 안전이 크게 위협받게 된 것이다.

2018년 미국과 러시아, 유럽 연구진은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2050년을 기준으로 시베리아를 포함한 영구동토층의 손상이 인간이 세운 구조물에 주는 영향을 분석했다. 그 결과 영구동토층에 거주 중인 인구의 4분의 3인 360만명가량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논문은 결론 내렸다.

이 지역에는 철도와 송유관, 가스관이 거미줄처럼 부설돼 있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전과 가스전의 45%도 몰려 있다. 공항도 100여개에 이른다. 게다가 이번 연료저장고 파괴에서 본 것처럼 영구동토층의 손상은 주택이나 빌딩, 공장과 같은 건물의 안전성도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붕괴로 인한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것이다. 논문이 영구동토층 손상 지역으로 지목한 곳에는 3만6000채의 건물이 있는데, 모두 잠재적인 위협을 안게 되는 것이다.

김지석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전문위원은 “이미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극권 주변의 영구동토층이 녹아 생긴 진흙탕 때문에 도로에서 차가 주행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 전문위원은 “기후변화가 중장기적인 문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중요하다”며 “기업들 입장에서도 전기차나 이차전지처럼 기후변화에 즉각 대응하는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 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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