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에 정면 도전..학문하는 자의 주체적 자세를 부르짖다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 (13)]

김언호 2020. 6. 16.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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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자 이우성

[경향신문]

우리 고전 연구를 집성시킨 한국학의 거목 이우성 선생. 고향 밀양 퇴로리에서.

일제강점기에 온몸으로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사상가·실천가들의 정신을 나는 동시대인들과 함께 읽고 싶었다. 1980년부터 2년에 걸쳐 펴낸 <한용운> <신채호> <김구> <박은식> <김창숙> <조소앙>이 그 책들이었다. 일제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편은 이우성(李佑成·1925~2017) 선생의 기획이었다.

“심산 선생은 민족주의자로 자명(自命)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일과 일제에 대해 비타협·불복종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해방 후에는 민족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노선을 천명했다. 분단에 대한 통한과 통일에의 염원을 잠시도 잊지 못했다.”

이우성은 1947년 22세 청년으로 심산 선생을 만난다. 심산은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을 담당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이우성의 공부가 대단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를 불렀다. “자네가 이우성인가. 교수가 되기엔 너무 어리니 우리 대학에 학생으로 입학해 두게.” 나이도 나이지만 대학 학력도 없었으니 심산의 반응은 당연했을 것이다.

6·25가 터졌다. 수도가 부산으로 피란왔다. 성균관대는 이우성이 교사로 재직하는 부산고 가건물에 더부살이하는 형편이었다. 이우성은 낮에는 교사, 밤에는 학생 노릇을 했다.

이우성에게 또 하나 정신의 기둥은 단재 신채호였다. 1985년 10월, 나는 이우성 선생을 뵙고 단재의 민족독립정신과 역사정신을 오늘에 다시 세우는 일을 해보자고 의논드렸다. 선생도 이미 심산상과 함께 단재상을 구상하고 있었다. 1986년 단재 선생 순국 50주년을 맞아 이우성과 변형윤·강만길 교수가 이끄는 단재상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단재 신채호! 일편단심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선생은 1936년 2월21일 오후 4시20분,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단재 선생이 순국했다는 비보를 접한 심산 선생은 “단재의 죽음으로 나라에 정기(正氣)가 쓰러졌다”고 통탄했다.

■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민족사의 진취적 지향 염두에 둔
과학적인 사회관계 분석을 강조
“지금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이 땅의 역사학도에 주어진 과제”

1982년 4월 한길사는 임형택·최원식 편으로 <한국근대문학사론>을 펴낸다. 1960년대 이후 고조된 민족적 각성과 민주화운동으로 개안된 ‘민족주체적인 시각’으로 근대문학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이우성 선생의 ‘고대시와 현대시의 교차점’을 경이롭게 읽었다. 1962년 발표했다는 사실도 주목되었다.

“시는 민족과 더불어 성장한다. 시인은 민족의 고난을 몸으로 체험하며 시를 생산해야 한다. 국토는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고 대중의 실천·노동에 의하여 변혁된 역사적 존재며 생활을 매개로 친해지는 자연이다.”

나는 그 무렵 우리 국토와 산하를 온몸으로 답사하는 역사기행을 구상하고 있었다. 선생은 국토기행 기획에 큰 관심을 표했다. 민족이 살아온 발자취, 민중의 삶과 정서를 다양한 시각과 방법으로 인식하는 국토운동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했다.

1982년 8월 창작과비평사가 출간하는 <한국의 역사상>은 문·사·철을 아우르는 이우성의 학문과 지성의 넓이·깊이를 보여준다.

이우성의 역사학은 ‘민족사학’이다. 민족사의 진취적·역동적 지향을 늘 염두에 두었지만 과학적인 사회관계 분석을 통한 민족사의 정립을 강조했다. “학문의 주체성, 학문하는 자의 주체적인 자세”는 사학자 이우성의 확고한 문제의식이었다. “지금 이곳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것이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역사학도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과제다.”

■ 식민지 현실로 조부의 유훈을 못 지켜

신라의 토지 사적 소유 증명하고
발해를 민족사 안으로 끌어들여
실학의 ‘내재적 발전론’ 정립 등
선구적 연구로 역사학계 경각

이우성은 경남 밀양의 퇴로(退老)에서 1925년에 태어났다. ‘문한(文翰)’과 ‘부(富)’를 함께 누리는 양반가문이었다. 부친은 ‘개명(開明)적 지주형’ 인사였다. 일제하 한국인으로 가장 큰 규모의 누에종자 제조업을 경영했다. 그럼에도 집안에서는 “조부의 유훈을 받들어” 그를 끝내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일제가 강요했던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고 가문의 각별한 관심하에 ‘독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증조부 항재공(恒齋公, 李翊九·1838~1912)과 조부 성헌공(省軒公, 李炳熹·1859~1938)은 유학자이자 역사가였다. 항재공은 사론적 성격의 <서고독사차기>(西皐讀史箚記)를 저술했고, 성헌공은 조선조의 역사를 기술한 <조선사강목>(朝鮮史綱目)을 저술했다. <조선사강목>은 숙종에서 중단된 미완성 대작이었다. <조선사강목>을 완성하는 것이 그 손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문중이 근대적인 학교인 정진의숙(正進義塾)을 설립해 운영하고, 서울이나 일본에서 유학하는 친척이 여럿 있었지만 유독 이 손자는 전통적인 공부를 해야 했다. 조부는 “글공부를 중단하지 말고 방향도 바꾸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부의 유훈’은 ‘가학의 계승’이었다. 그러나 조부의 유훈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한 현실이 펼쳐졌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되었다. 조부의 <조선사강목> 사초(史草)를 압수당했다. 부친이 경남경찰부 고등과에 구속되었다.

이우성은 드디어 집 안에 소장된 ‘만 권의 책’에서 근대적 지식을 만나게 된다.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만난다. 집안 어른들이 정통의 공부를 하는 손자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치워두었던 책이다. 이우성은 이 책을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 근대의 발견이었다. 일본에 유학하다가 학병으로 끌려간 자형이 역사·철학 책들을 보내와서 “서양에 관한 지식, 현대에 관한 지식을 나름대로 섭취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사상과 유물론적 사관에 대한 이해도 점차 갖게 되었다.

이우성 선생은 여름이면 젊은 연구자들과 우리 고전을 탐구하는 워크숍을 열었다(왼쪽 사진). 이우성 선생의 집안에서 실학의 태두 이익의 사상을 집성하는 <성호집>을 간행했다. 판목 1041장이 보존되어 있다.

■ 전두환 신군부 비판 ‘361인 선언’ 주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비판
정신문화연구원 영입을 거부
전두환 시절엔 ‘교수 선언’ 주도
강직한 신념 끝내 굽히지 않아

이우성은 1960년 4월혁명과 함께 진전되는 ‘학원의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61년 동아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 성균관대로 옮긴 선생은 1960년대 중반에는 박정희 정권의 졸속한 한·일 회담을 비판하는 역사학회의 성명을 주도한다. 다시 1980년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하는 ‘교수 361인 선언’을 주도한다. 이 일로 잡혀가서 10여일간 조사받는다. 4년 동안 ‘해직교수’가 된다.

선생의 선구적인 연구는 역사학계를 경각시킨다. 신라 때부터 토지의 사적 소유가 있었다는 실증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일본 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에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있었지만 조선에는 없었다는 관점을 뒤집는다. 발해를 민족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신라와 발해는 한 민족으로서 ‘남북국시대’를 전개했다는 연구다. 실학 연구에 몰두하여, 실학파가 추구한 개혁사상을 ‘내재적 발전론’으로 정립했다. 근대로의 지향을 실학의 시기로 잡아 자본주의 맹아론을 도출했다.

“나는 역사를 공부할 때부터 식민지 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 민족의 사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민족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진정한 민족사관이지요.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 30년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신정권이 잘했기 때문이 아니고, 민중이 북방 오랑캐들을 막아내고 나라와 문화를 지켜내야겠다는 의지가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 고전의 천착

1995년 한길사는 이우성 선생이 1960년대부터 천착한 우리 고전 연구를 집성하는 <한국고전의 발견>을 펴낸다. 사진작가 황헌만의 컬러사진을 곁들여 나는 큰책으로 번듯하게 만들었다.

“물질만능의 풍조 속에 굳건히 자기를 지켜가며 민족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지주(支柱)가 될 수 있는 품위 있는 학자·지식인이 지금 어느 시기보다 절실히 요망된다. 우리 조상들의 심오한 철학적 사색과 격조 높은 시문학의 정서가 담겨 있는 고전을 가까이하고 읽는 일이 요구된다.”

이규보·이승휴의 <고려명현집>부터 이황의 <퇴계전서>, 김육의 <잠곡전집>, 허목의 <미수기언>, 이익의 <성호전서>, 안정복의 <동사강목>, 박지원의 <연암집>,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최한기의 <명남루전집>, 김창숙의 <심산유고>까지 우리 민족이 창출해낸 고전 39종의 이론과 사상을 해석해내는 <한국고전의 발견>을 펴내는 선생의 표정은 밝았다.

“옛 책이라고 하여 다 고전이 아니다. 역사를 통하여 여과된 고전만이 고전이다. 읽는 사람의 눈을 통하여 가슴에 와 닿을 때 비로소 고전의 값을 한다.”

2001년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이우성 선생은 <도산서원>을 편한다. 윤사순·금창태·정순우·이동환·송재소·임형택·이상해 등 한국의 퇴계 연구자, 두 웨이밍·장리원·도모에다 류타로 등 중국·일본의 퇴계 연구자들이 써낸 주요 논문을 수록했다. 자신이 쓴 ‘퇴계 선생의 이상사회와 서원창설운동’이 머리글로 실렸다. 도산서원의 사계와 의례를 담아낸 황헌만의 사진들이 책을 빛나게 했다.

“도산서원은 16세기 말 창립된 이래, 조선시대 사림의 정신적 메카가 되어왔고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귀중한 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 시절부터 퇴계 선생이 직접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으로 선생의 학문의 체취가 그대로 스며 있는 곳에 대강장(大講場)인 도산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생전과 사후가 그대로 연결된 도산서원의 배경과 유서는 실로 우리나라 서원의 전형이다.”

2003년 선생은 <퇴로리지>(退老里誌)를 간행한다. 퇴로 마을 풍경, 퇴로의 건축물들과 퇴로의 의례, 장서와 인보와 간찰을 사진으로 담았다. <항재집> <독사차기> <조선사강목>의 해제와 정진학교 연구를 실었다. 밀양 근대교육의 요람 정진학교는 1899년 항재 이익구가 세운 화산의숙을 1921년에 개편하여 개교했는데, 1939년 일제는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정진학교를 기어코 폐교시킨다. 나는 황헌만이 촬영작업할 때 여러 차례 퇴로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우성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기도 했다. 고서들의 보존을 걱정하는 말씀도 했다.

■ 정신문화연구원 영입을 단호히 거부

선생은 1990년 퇴임 후 연구실 실시학사(實是學舍)를 열고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우리 고전 연구에 정진한다. 한길사는 그 연구결과를 출간한다. <다산의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1995), <다산과 문산(文山)의 인성(人性) 논쟁>(1996), <조희룡전집> 전 5권(1999), <다산과 대산(臺山)·연천(淵泉)의 경학논쟁>(2000), <다산의 경학세계>(2002)가 그것이다.

유신 말기 박정희는 정신문화연구원을 만들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선생의 영입을 한사코 시도했다.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선생에게, 대통령이 결재한 사안이라 되돌릴 수 없다면서 협박과 회유를 가해왔다. 선생은 끝끝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해직 시절, 일본의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교수를 비롯한 양심적인 학자들이 선생의 처지를 걱정하여 선생 내외를 초청해 도쿄에서 1년 동안 체류하게 한다. 선생과 의논해 환영회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참석자들 모두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런 와중에 교과서 문제가 터졌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준비했으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환영회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교과서 문제를 좌시하는 사람들과는 자리를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타다 교수가 직접 찾아와서 “우리들은 교과서 문제를 묵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항의집회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간곡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참석 거부를 철회하여 환영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하타다 교수는 “이우성 선생에 대한 존경의 염(念)이 한층 더 깊어졌다”고 했다.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김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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