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북극 비행하는, 귀한 여행객들의 환승 센터
중국과 불과 300km, 호주~북극 철새들의 이동 경로
수천km 비행에 지친 새들의 휴식처, 습지 복원 등 지원 필요
지난달 19일 오전 세찬 바람과 보슬비에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어청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갔을 때였다. 잔디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는 낯선 새가 눈에 띄었다. 검은 머리에 등과 배가 잿빛 분홍색을 띤 분홍찌르레기였다. 18년 전 이 섬에서 마지막으로 관찰 기록을 남긴 희귀한 나그네새다! …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메뚜기를 주로 사냥하고 인도와 열대 아시아에서 월동하는 새가 어쩌다 서해의 외딴 섬까지 왔을까. 최근 번성한 메뚜기떼와 관련이 있을까. 정신없이 셔터를 누를 짬만 주고 날아가 버린 아쉬움에 상념만 길어졌다.
전북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리 어청도는 희귀한 새를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어 탐조객들에겐 ‘꿈의 섬’이다. 군산시에서 72㎞ 떨어져 여객선으로 2시간 반 걸리는, 고군산군도의 가장 외딴섬이다. 서해 최외곽 섬이어서 중국 산둥반도까지 거리는 불과 300㎞이다.
_______ 우리나라 새의 절반이 오가는 곳
사람에게 어청도가 영토 관할권을 정하는 끝점으로 중요하다면 새들에게는 생명을 담보하는 중요한 중간 기착지이다. 호주에서 동남아와 동아시아, 북극으로 이어지는 세계 9대 이동 경로의 하나인 ‘동아시아-대양주 이동 경로’(EAAF) 한가운데 있어 겨울 철새와 여름 철새, 그리고 이동 과정에서 길이나 무리를 잃은 나그네새까지 이곳에 들른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새가 모두 560여 종인데, 면적 1.8㎢에 섬 둘레가 10.8㎞인 작은 어청도를 찾는 새는 그 절반 가까운 250여 종에 이른다.
어청도는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수천㎞를 이동하는 새들이 휴식하고 물과 먹이로 활력을 되찾는 곳이다. 오랜 여정을 마치고 어청도에 내려앉는 새 대부분은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다. 나뭇가지를 움켜쥘 힘도 없는지 대개 풀숲에 내려앉는다. 허기진 몸을 풀잎에 의지하며 날개를 늘어뜨린 채 퍼덕이며 먹이를 찾는다. 2~3일 정도면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3~10일 정도 더 섬에 머물면서 힘을 비축해 번식지까지의 긴 여정과 번식 경쟁을 대비한다.
3년 전부터 해마다 어청도를 찾았지만, 올해처럼 다양한 희귀 새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5월엔 17년 전 어청도에서 기록된 붉은가슴흰꼬리딱새를 관찰할 수 있었다. 또 희귀한 잿빛쇠찌르레기를 비롯해 쇠찌르레기, 분홍찌르레기, 북방쇠찌르레기, 붉은부리찌르레기, 찌르레기 등 흰점찌르레기만 빼고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찌르레기 7종을 모두 관찰하는 행운을 만났다.
육지를 오가며 28일 동안 어청도를 지킨 것이 한몫했다. 이동 시기에는 시시각각으로 새들이 오기 때문에 지속해서 관찰하면 훨씬 다양한 새들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청도의 탐조 시기는 새들의 이동 시기인 4월 초부터 5월 말이다. 그 가운데 탐조 최적기는 4월 중순∼5월 중순으로 보인다.
이동 시기 초기에는 되새과, 지빠귀과, 멧새과, 솔딱새과, 종다리과, 할미새과가 많이 관찰되고 후기에는 도요새과, 두견이과, 솔새과, 때까치과, 백로과 등이 관찰된다.
희귀하거나 멋진 새와 만나는 것은 탐조의 최대 기쁨이다. 어청도에서 관찰한 새 가운데 검은바람까마귀도 인상적이었다. 주로 주변 환경이 확 트인 곳에서 기다리다 날아다니는 곤충을 잡아먹는데, 상하좌우로 바람에 나부끼며 흐느적거리는 몸짓에 하늘에서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듯 마음대로 방향을 틀어 사냥감을 추적하는 모습이 독특했다. 섬휘파람새는 나무 꼭대기에서 온종일 울어댄다. 다양한 종들의 새가 많이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고 다른 새소리와 어우러져 풍요로운 생명을 느끼게 한다.
많은 새가 찾아오는 어청도의 터줏대감은 매다. 섬 주변을 돌며 이동 길목에서 기다리다 사냥에 나선다. 경계심보다는 신중함과 대범함이 돋보이는 맹금류다. 최상위 포식자답게 외부의 간섭을 싫어하고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청도에는 지리적으로 농경지가 없어 새들은 마을 주변의 텃밭과 작은 관목이 있는 울타리 근처를 주로 이용한다. 김을 맨 텃밭이나 풀을 베어 버린 곳에는 어김없이 많은 새가 몰려든다. 다양한 애벌레와 곤충이 사는 곳이다. 그러나 그나마 있던 텃밭마저 줄어들고 있다.
어청도 초등학교 잔디운동장이 새들에게 먹이를 넉넉하게 제공하는 유일한 장소다. 다행히 샘과 물이 풍부하지만, 새들을 배려하는 공간이 점차 줄어들어 아쉽다. 세계적인 새들의 이동 중간 기착지에 대한 군산시의 적극적인 관심과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_______ 새들을 지키는 섬으로
농경지가 사라지고 있는데, 대안으로 밭농사를 권장하여 경작자와 생물다양성 계약을 맺고 지원금을 주는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겠다. 저수지 아래 새들이 가장 많이 찾던 습지는 이미 오래전에 매립돼 체육관을 짓고 있다. 주변에 새들을 위한 습지도 함께 복원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어청도는 조선 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봉수대를 설치했던 곳이다. 1970년대까지 고래잡이 선박이 정박했고 지금도 기상이 악화하면 어선들이 피항하는 곳이다. 사람을 지킨 어청도를 이제 세계적인 새들의 이동 경로를 지키는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면 어떨까. 새들이 어쩔 수 없이 거쳐 가는 섬이 아니라 새들이 찾아드는 아름다운 섬, 새들의 낙원으로 거듭 태어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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