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대성당에 5000장의 슬픈 얼굴 사진 [김향미의 '찬찬히 본 세계']
[경향신문]

14일(현지시간) 페루 리마의 대성당에 5000여 신도석이 가득 찼다. 자리를 채운 이들 중 살아 숨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코로나19로 숨진 이들의 사진이 신도석을 채운 것이다.
이날 카를로스 카스티요 대주교의 집전으로 대성당에서 성체축일 미사가 열렸다. 현지 매체 인포바에 등에 따르면 미사를 앞두고 성당 측은 유족들로부터 코로나19 사망자들의 사진을 건네받았다. 5000장이 넘는 사진은 신도석을 가득 채우고, 성당 벽과 기둥에도 붙여졌다.
이날 미사는 국영 TV와 인터넷 등에서 생중계됐다. 카스티요 대주교는 숨진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더 힘든 시간이 온다”고 경고했다. 오랜 봉쇄 속에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빈곤과 기아에 내몰린 상황을 가리킨 것이다. 대주교는 “앞으로의 죽음이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굶주림 때문이라면 끔찍할 것”이라고 말했다.
■빠르게 대응했지만…
페루 정부는 아시아에 이어 유럽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중남미 국가 중 가장 발빠르게 봉쇄 조치를 취했다. 지난 3월16일 국경을 봉쇄했고, 야간 통행 및 국내 여행을 금지했으며, 모든 비필수 사업의 운영도 금지했다. 당시 페루에서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71명, 사망자는 없었다. 또 정부는 비교적 많은 코로나19 진단 검사를 진행했고, 병원 침대 및 인공호흡기 확보에도 공을 들였다. 식량·현금 지원 정책도 마련했다. 페루는 코로나19와 싸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했다.
하지만 인구 3300만명의 페루에선 현재까지 22만9736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됐고, 6688명이 숨졌다. 중남미 지역에선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피해가 심각하고, 전 세계로 따져봐도 손에 꼽힐 정도로 피해 규모가 크다. 무엇보다 강력한 봉쇄 조치 기간이 만 3개월이 다 됐는데도, ‘코로나19 감염 곡선’이 여전히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국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봉쇄령을 내렸다가 최근 코로나19 감염 곡선이 완만해지면서 경제활동을 재개한 것과 대조된다. 페루는 마르틴 비스카라 대통령의 지휘 아래 여느 선진국처럼 빠르고 강력한 대응을 했지만, 현재는 코로나19 방역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불평등과 부패, 경제성장의 취약점
미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은 “페루의 뿌리깊은 불평등과 부패”를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일단 국민 상당수는 정부의 봉쇄 조치를 따를 수 없었다. 페루리서치그룹 그레이드의 우고 뇨포는 지난 12일 뉴욕타임스에 “정부는 집에 머물라고 했지만 모아놓은 돈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고, 정부는 손을 씻으라고 했지만 빈곤층 3가구 중 1가구는 수도시설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리마에서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했던 29살의 에두아르도 호세 도밍게스는 봉쇄 조치 이후 가게 문을 닫게 되자, 목수 일이나 야간 순찰 등으로 하루 15시간씩 돈벌이를 해야 했다. 며칠 후 기침 등 코로나19 증상을 보여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에선 환자를 더 받지 못한다고 했다. 다음날 도밍게스는 호흡곤란을 겪었고, 결국 숨졌다. 페루 노동 인구의 70%는 사회 안정망 밖에 있다. 뿌리 깊은 불평등은 봉쇄 조치를 무효하게 만들어버렸다.
봉쇄 정책에 ‘구멍’도 있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지적했다. 페루에서 냉장고가 있는 집은 절반 정도인데, 이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번번이 시장에 나가야 한다는 것의 의미했다. 좁고 붐비는 시장은 코로나19의 ‘핫스폿’이 됐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페루인의 60%는 은행 계좌가 없다. 정부의 현금 지원을 받으려면 은행 지점에 가서 긴 줄을 서야 했고, 이 또한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높였다. ‘시장’과 ‘은행 앞’에선 별도의 방역 대책이 필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다른 문제는 ‘부패’였다. 3월 봉쇄 조치 이후 반부패 검사들은 500여건의 신고를 받았다. 공무원들이 식량 지원이나 개인 보호장비 구입 비용 등을 빼돌렸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이나 군인이 연루된 사건도 20여건이었다.
광업과 농업 발전, 신중한 금융 정책으로 안정적인 경제성장(2018년 4%)을 보여온 페루는 ‘중산층이 튼튼한 나라’를 지향해왔다. 하지만 리마에 있는 퍼시픽대학의 경제학자인 파블로 라바도는 뉴욕타임스에 “페루는 지난 20년간 성장해왔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는 적었고, 건강 보험에 대한 투자도 적었다. 전염병 위기는 페루 경제발전의 취약성을 드러냈다”고 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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