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 짧게 잡고 초고속 스윙..'장효조가 안 치면 볼' 선구안도

정영재 2020. 6. 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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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m 11초3, 3루쪽 툭 치면 안타
프로 첫해 홈런도 18개로 3위 '괴력'
연습할 때 100번 쉬지 않고 타격도
"수비·큰 경기 약하다" 삼성서 밀려
상복 없고 지도자 생활도 빛 못 봐
55세 요절, 일주일 뒤 최동원도 별세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프로야구 통산 타율 0.331 톱타자
스윙 스피드와 파워가 압도적이었던 장효조는 배트마저 짧게 잡았다. 투수의 공을 배트에 정확하게 맞히는 능력은 역대 최고라는 인정을 받았다. [중앙포토]
장효조(1956∼2011)의 별명은 ‘타격의 달인’ ‘안타제조기’였다. 그는 대한민국 야구 사상 가장 정확한 타격을 구사한 타자로 꼽힌다. 프로 통산 타율 0.331로 2위 양준혁(0.316)을 멀찌감치 따돌린 역대 1위다.

장효조는 정확한 타자일 뿐더러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였다. 1m74㎝, 70kg의 다소 왜소해 보이는 체격에도 프로 첫 해인 1983년 홈런 3위(18개)에 올랐다. 그 해 타격왕(0.369)도 장효조였다.

장효조는 비운의 스타이기도 했다. 삼성 라이온즈에 뼈를 묻고 싶었지만 타의로 부산(롯데 자이언츠)으로 옮겨야 했다. 장효조가 태어난 곳은 부산이다. 초등학교 때 대구로 전학 가 삼덕초-대구중-대구상고(현 상원고)를 거쳤다. 현역 때는 상복이 없었고, 지도자로서도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위암·간암이 겹쳐 55세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그의 부음을 접한 야구팬들은 일주일 뒤 또 다른 레전드 최동원을 잃었다. 둘은 1988년 한 달 간격으로 팀을 맞바꾼 사이였다.

140kg 벤치프레스 거뜬히 해내

2011년 9월 7일 잠실구장에서 선수들이 장효조 감독을 추모하고 있다. [중앙포토]
장효조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야구인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김한근 전 한양대 감독”이라고 했다. 호타준족 3루수 김한근은 장효조와 대구중-대구상고-한양대 동기고, 삼성에서도 한솥밥을 먹었다. 김 전 감독에게 장효조가 어떤 선수였는지 물었다. “볼 맞히는 기술만큼은 당대 최고였죠. 한번 배터박스에 서면 100번을 쉬지 않고 타격을 할 정도로 힘이 좋았어요. 기술·체력·근성을 모두 갖춘 선수였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지는 김 전 감독의 증언이다.

“한양대 신입생 때 야구협회에서 대학·실업 우수 선수를 모아 훈련을 시켰어요. 동대문운동장 지하 웨이트장에서 효조가 벤치프레스 역기에 바벨을 척척 갖다 붙이는데 140kg은 되는 것 같았어요. 거기 딱 눕더니 ‘끙’ 하고 역기를 들어올리고, 한 번 더 든 다음에 역기를 내려놨어요. 옆에 있던 윤동균 형(당시 육군)이 ‘나도 한번 해 볼까’ 하면서 도전했는데 딱 하나만 들더라고요. 힘깨나 쓴다던 나도 역기를 잡고 용을 썼는데 꼼짝도 안 해요. 효조는 힘이 장사인데다 발도 원체 빨랐어요. 대학 1학년 때 100m를 쟀는데 나랑 똑같이 11초3이 나왔죠.”

‘장효조가 안 치면 볼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효조는 선구안이 좋았다. 김 감독은 이 또한 그의 타고난 힘과 연관지어 설명했다. “일본의 이치로가 타석 7m 앞까지 볼을 보고 칠지 말지를 결정한다고 하잖아요. 효조도 힘이 좋아 배트를 끌고 나오는 스피드가 워낙 빨랐어요. 남들보다 공을 더 오래 보니 선구안이 좋을 수밖에요. 좀 늦었다 싶으면 3루 쪽으로 볼을 툭 맞혀 보내는데 타구에 힘이 실려 있어서 공이 크게 튀죠. 발 빠른 왼손타자니 1루에 충분히 세이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한 시즌에 내야안타를 30개 이상 쳤어요.”

장효조 감독의 아들 장의태씨.
장효조는 배트를 짧게 잡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김 전 감독의 말이다. “효조는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일본과의 결승전에서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한대화의 역전 스리런 홈런이 나왔다) 출전하느라 우리보다 1년 늦게 프로에 들어왔어요. 그해 삼성이 일본 후쿠야마에 베이스 캠프를 쳤는데 초반 연습경기에서 효조가 안타를 못 치는 겁니다. 자존심이 되게 상했겠죠. 갑자기 배트를 엄청나게 짧게 잡는 겁니다. 원체 배트 스피드 빠르고 스윙도 좋은 녀석이 배트까지 짧게 잡으니 공을 못 때릴 수가 없지요. 그만큼 효조는 적응력과 근성이 뛰어났습니다.”

장효조는 상복이 없었다. 1983년 수위타자를 하고도 신인왕은 박종훈(OB)에게 넘겨줬다. 27살에 입단한 중고(中古) 신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삼성에서는 한국시리즈 우승도 하지 못했다.

수비도 강한 편이 아니었다. 타구 판단을 잘못해 평범한 플라이를 장타로 만들어 주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게 84년 롯데와의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나온 ‘한문연 타구 만세 사건’이다. 4-1로 삼성이 앞선 7회 초, 우익수 장효조는 한문연의 뜬공을 처리하러 달려나왔는데 공은 그의 머리를 넘어가 1타점 3루타가 됐다. 8회 초 4-3에서 유두열의 역전 스리런 홈런이 터졌다.

장효조는 큰 경기나 결정적인 찬스에서 이름값을 못 했다. 1988년 11월, 세상을 놀라게 한 김시진(삼성)-최동원(롯데) 맞트레이드가 이뤄진다. 한 달 뒤 장효조는 롯데 4번 타자 김용철과 유니폼을 바꿔 입는다. 프로야구 사상 가장 충격적인 맞트레이드의 배경을 보면 롯데는 선수협 결성을 주도한 최동원·김용철과 같이 갈 생각이 없었고, 삼성은 팀 분위기를 쇄신하면서 큰 경기에 강한 선수를 영입하려 했던 것 같다.

수위타자 하고도 신인왕 못 받아

장효조는 롯데에서 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지만 이미 전성기는 아니었다. 롯데에는 남두오성(南斗五星)이라 불리던 전준호-이종운-박정태-김민호-김응국이 있었다.

우승 후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은 장효조는 롯데 타격코치를 맡았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스타 출신 지도자가 흔히 겪는 ‘그게 왜 안돼?’ 증후군이 드러났다. 자신의 경험과 능력치 수준으로 가르치니 선수들이 못 따라왔다. 장효조는 후일 “은퇴 후 지도자 공부를 체계적으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후 잠깐 삼성 타격코치를 맡았지만 1년 만에 옷을 벗어야 했다. 장효조는 한때 주점을 운영했고, 지인들과 어울려 술을 자주 마셨다. 2005년 삼성 스카우트로 야구계에 복귀할 때 감격해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2011년 7월 23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전에 나온 게 팬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였다.

김한근 전 감독은 “효조는 재능에 비해 운이 따르지 않았어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소심한 사람이었죠. 지금처럼 고졸 신인으로 프로에 갔다면 프로야구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록을 세웠겠죠”라고 말했다. 솔직히 지금도 그를 넘어선 타자는 없다.

■ 삼성 영구결번 10번은 장효조 아닌 양준혁

「 롯데 11번 최동원, 해태(현 KIA) 18번 선동열, 삼성 36번 이승엽…. 은퇴 후 등번호가 영구결번된 선수들이다. 프로야구 각 구단이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선수는 14명이다.

장효조는 아마추어와 프로야구 삼성 시절 10번을 달고 뛰었다. 삼성의 10번도 영구결번인데 대상이 장효조가 아닌 양준혁이다. 장효조는 삼성에서 6년간 뛴 뒤 롯데로 옮겼다.

당시 롯데에는 4번 타자 ‘자갈치’ 김민호가 10번을 달고 있었다. 장효조는 20번을 받고 4년간 뛰었다. 양준혁은 93년 삼성에 입단해 15년간 뛰면서 네 차례 수위타자에 올랐다.

야구팬들은 장효조의 10번을 영구결번으로 예우하지 않은 당시 삼성 구단을 원망했다. 구단과 사이가 틀어져 트레이드됐다고는 하나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거다.

양준혁도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다. 그는 대구상고 선배인 장효조의 등번호를 물려받았고 영구결번의 영예도 얻었다. 그는 선배의 부음을 접한 뒤 “대구상고 입학 당시 장 감독님의 지도를 받고 타격에 새롭게 눈을 떴다”며 “내가 영구결번이 되고 영광을 누렸지만, 사실 그 번호는 장효조 선배님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10번을 장효조-양준혁 공동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게 맞다”는 주장도 있다. 2011년 10월 25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 장효조 감독의 아들 장의태씨가 등번호 331번을 달고 시구를 했다. 아버지의 통산 타율 0.331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당시 “10번이 안 된다면 331번을 영구결번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 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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