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DEBUT] 현실판 서태웅부터 어린왕자로 불린 김동우

민준구 2020. 6. 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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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농구대잔치의 인기가 크게 식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 무스로 머리를 바짝 올린 미소년의 등장은 많은 여성 팬들을 설레게 했다. 마치 「슬램덩크」의 서태웅처럼 멋진 외모에 실력까지 겸비했던 연세대 김동우는 그렇게 농구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 김동우와 농구의 관계는 서울 상신중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깊지 않았다. 동네에서 길거리 농구로 유명세를 떨쳤고 여러 학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정식 선수의 꿈을 키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농구를 너무 사랑했던 김동우는 완강했던 부모님의 마음도 녹일 정도의 간절함을 보였다. 운동선수 출신이었던 어머니의 반대에도 김동우는 꺾이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결국 3학년이 됐을 때 명지중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어머니가 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계셨다. 아들이 힘든 길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셨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긴 대화 끝에 잘 설득할 수 있었고 명지중 3학년 때부터 정식적으로 농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김동우의 말이다.

길거리 농구에서는 알아주는 강자로 꼽혔지만 정식 농구는 달랐다. 특히 풀 코트 게임에 대한 적응이 어려웠다. 기본적인 러닝 훈련조차 기존 선수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던 탓에 유급을 결정했고 고난 끝에 명지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지중 3학년 때 이미 188cm의 신장이었던 김동우는 명지고 시절에는 2m에 가까워졌다. 훗날 KBL에서 발표된 공식 신장은 196cm이지만 연세대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2m로 표기될 정도였다. 타고난 신장, 그리고 신체 능력은 김동우의 엄청난 노력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며 단숨에 에이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그렇게 김동우는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타고난 조건을 갖췄던 김동우가 짧은 시간 내에 에이스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새벽 훈련은 기본이었으며 남들이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지금으로서는 혹사 논란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강도를 쉽게 상상하기는 힘들다.

박성근 감독과 정훈, 이근석 등 한 해 선배들이 낙생고로 옮겼을 때도 명지고가 강팀으로 꼽힐 수 있었던 것은 김동우가 빠른 시간 내에 성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물론 당시 명지고는 기존 전력이 탄탄한 팀이었다). 그 이면에는 김동우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다.

김동우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참 많이 맞기도 했고 열심히 운동한 때이기도 하다. 정말 혹독한 세월을 보냈다. 농구밖에 몰랐고 일어나고 자기 전까지, 아니 꿈에서도 농구만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명지고에서의 3년이 지났고 대학에 갈 시기가 찾아왔다”라고 말했다.

농구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고교 랭킹 1위가 된 김동우. 이미 고교 무대에선 적수가 없었던 그에게 수많은 대학이 러브콜을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건 연세대와 고려대. 그리고 김동우는 연세대를 선택했다.

김동우가 연세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김동우는 최희암 감독에 대한 신뢰 하나만으로 독수리 군단을 선택했다.

“부모님의 선택도 그러셨지만 최희암 감독님께서 워낙 많은 관심을 보내주셨다.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고 어떤 농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방향성도 제시해주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세대를 선택했던 것 같다.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신입생 김동우는 이미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 1999년 입학 후 MBC배 대학연맹전에선 중앙대 김주성을 상대로 인 유어 페이스를 성공했으며 대학 최고의 선수로 꼽힌 송영진을 상대로 자신의 플레이를 모두 선보였다.

당시 서장훈의 졸업 이후 확실한 빅맨이 없었던 연세대는 김동우를 4번(파워포워드)으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센터는 박광재). 그러나 김동우의 플레이 스타일은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득점할 수 있었고 수비 반경도 좁지 않았다. 그렇게 신입생 때부터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김동우는 연세대의 에이스로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이때부터 김동우에게는 다양한 별명이 붙었다. 「슬램덩크」의 서태웅과 같다는 뜻에서 ‘현실판 서태웅’이라 불렸고 동안에 잘생긴 외모로 ‘어린 왕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동우는 애써 부정했지만 당시 수많은 여성 팬들의 사랑도 받았다고 전해진다.

명지고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한 해 선배 정훈(당시 성균관대)과의 라이벌 구도 역시 대학농구의 최대 이슈였다. 성균관대의 슈터로서 정훈, 이한권과 함께 3인방으로 불린 진경석 청주 KB스타즈 코치는 “(김)동우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내외곽을 오고 갈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다. 상대편의 입장에선 참 넘기 힘든 상대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서태웅이었다고 생각한다. 못 하는 게 없었으니까. 아마 (정)훈이도 동의하는 부분일 것이다. 서로 비교가 될 정도로 대단했고 동우는 지금 선수들 중에서도 비교 대상이 없는 존재였다”라고 말했다.

※ 2000 코맥스배 농구대잔치_ 연세대 김동우 vs 성균관대 정훈
http://bitly.kr/vfWWQ1f61g

 

하지만 조금씩 부상이라는 악령이 김동우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농구를 늦게 시작했다는 스스로의 부담 때문에 몸을 혹사시킨 것이 문제였다.


김동우는 “지금처럼 코어 운동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무식하게 산을 뛰고 코트에 남아 훈련을 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라기보다는 조바심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몸이 조금씩 망가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그래도 연세대 시절까지는 티가 나지 않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동우와 연세대는 4년 내내 성공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그동안 최대 경쟁 상대였던 중앙대, 고려대, 성균관대가 주축 선수들의 졸업 공백을 쉽게 메꾸지 못하며 주춤한 4학년 시절은 적수가 없었다. MBC배 대학연맹전부터 종별선수권대회까지 무려 4관왕을 차지한 김동우는 프로 진출 직전에 열린 2002-2003 농구대잔치에서 우승과 함께 MVP에 선정되며 최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이때만 하더라도 김동우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을 듯했다. 모든 프로 구단이 주목하는 슈퍼 신인이었고 전체 1순위 지명은 당연했다.

2003년 1월 28일,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03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김동우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됐다.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울산 모비스는 즉시 전력감이라는 평가 아래 김동우를 선택했고 그렇게 성공은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김동우의 프로 데뷔전 역시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03년 10월 25일, 5,924명이 운집한 창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모비스와 LG의 시즌 첫 경기에서 당당히 코트를 밟을 수 있었다.

1쿼터를 벤치에서 보낸 김동우는 2쿼터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전형수의 수비 성공에 이어 첫 득점을 기록하면서 팬들의 박수를 받았다. 데뷔전 성적은 21분 47초 출전, 10득점 1리바운드 1스틸. 비록 모비스는 연장 접전 끝에 93-100으로 패했지만 김동우의 첫 경기는 인상적이었다.

이후에도 김동우는 승승장구했다. 20경기 가까이 주전급으로 대우받으며 평균 10득점 이상씩을 기록했다. 모비스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신인상은 김동우의 차지가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학 시절부터 무릎 통증을 달고 살았던 김동우에게 2003년 12월, 발목 부상이라는 치명타가 터지고 말았다. 발바닥 내측 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이었고 운동 능력을 주무기로 한 김동우에게 있어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사실 프로 데뷔 이후 초창기 시절은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물어봐도 길게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기대를 많이 받았고 스스로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발목 부상 이후 긴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유재학 감독님께서 정말 많이 신경써주신 때이기도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상처가 깊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김동우의 말이다.

2003-2004시즌을 그렇게 마친 김동우는 2004-2005시즌 이후에 2년이라는 공백기를 갖게 된다. 한국에서 치료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독일과 일본을 오고 가며 간신히 선수로서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김동우는 없었다. 최희암 감독의 지도 아래 장신임에도 3점슛을 연마했던 것을 떠올려 프로 생활은 이어갈 수 있었다. 다만 예전처럼 폭발력 있는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고 전매특허와도 같았던 러닝 덩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농구를 보기 시작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선 김동우는 그저 뱅크 3점슛으로 주목받은 슈터로 알기 쉬웠다.

2003-2004시즌 데뷔해 2014-2015시즌 은퇴할 때까지 김동우의 프로 생활은 과거에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그럼에도 비교적 롱-런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농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노력이란 단어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교 명지고에서 한국농구의 유망주들을 길러내고 있는 김동우. 그는 한 때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장신에 운동 능력까지 갖춘 슈퍼 유망주였다. 신체 조건은 과거에 비해 좋아졌지만 농구 기술은 부족해졌다는 현재의 KBL을 바라보면 과거의 김동우가 그리워진다.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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