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서류 줄이고 현장 가야"..안전공단 수장의 이천 참사 반성

민경호 기자 2020. 5. 31. 10: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노동자 산재 예방 전문 기관인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이후 대책을 의논하는 내부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발제자는 박두용 이사장, 발제문 제목은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참사로 본 노동현장 산업안전사고 재발방지 방안>이었습니다. 
 
 "이천 화재참사 이후 여러 부처와 기관에서 재발방지를 위한 다각적인 개선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중이다. (...) 여기에 더 보탤 것은 없고, 오히려 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문제점과 너무 많은 대책을 쏟아내니 어느 것이 진짜 문제고 어느 것이 해결가능한 방안인지 오히려 헷갈릴 정도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 박두용 (사진=연합뉴스)

박 이사장은 발제문에서, 우레탄이나 샌드위치 패널을 사용하는 것, 공기 단축을 위한 무리한 시공 등만이 문제점으로 지적받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한 재난에 원인이 하나일 수는 없는 만큼, 복합적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이 건설관리기술법에 의한 안전관리계획서 작성과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한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심사확인 제도를 꼽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문제만 생겼다하면 paper work만 하는 행정규제를 늘려온 측면이 있다.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규제행정기관은 새로운 행정규제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이해관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 안전규제는 행정규제상의 서류작업이 과다하게 많은 편이며, 중복되는 것도 많다."

박 이사장의 주장은 이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건설 현장의 안전 상황을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장치가 이 제도뿐이라는 것이 진짜 문제라고 박 이사장은 주장합니다. 안전관리계획서와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외에도 각종 교육자료, 물질안전보건자료 등 서류 더미만 쌓이면서 서류 규제가 과하고 중복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합니다.


실제, 이번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에 앞서, 박 이사장이 수장으로 있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6차례에 걸쳐 유해위험방지계획서를 심사하고 확인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한 달여 전인 3월 16일 현장 확인을 나갔지만, 당시 화재가 우려되는 작업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불티가 날리면 불이 날 수 있다는 주의만 있었을 뿐입니다.

** 관련 기사 ▶ '화재 위험' 6차례 경고 있었다…'조건부'로 넘어가 (4월 30일 SBS 8뉴스)
[ http://bitly.kr/sdc2y79BuO ]

이에 따라 정작 강화돼야 할 현장에 대한 감독은 비중과 그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박 이사장은 보고 있습니다. 특히 효과적인 현장점검 방법인 불시감독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획서를 단순히 심사하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감독해야 하고, 계획서를 심사하고 확인하는 것을 현장 확인감독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는데, 우리나라는 현장보다는 서류 확인에 더 힘쓰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참사 이후 이뤄진 각 지자체의 물류창고 건설현장 긴급점검에서도 불시 점검은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미리 보도자료를 배포해 점검 대상이 점검 사실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는 상황이고, 언론 동행취재를 앞두고는 전날 사전 방문까지 하는 상황입니다. 그 결과, 점검 당일에는 시공사 홍보팀 직원까지 현장에 나와 있고, 점검을 위해 나온 지자체 관계자나 전문가들을 위한 브리핑 자료도 미리 만들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렇게 현장점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서류점검만 강화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박 이사장은 모든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불시 현장 점검보다는 당연히 서류 규제가 낫고, 감독기관의 경우 서류 규제 위반 때에는 검찰에 송치하지 않아도 되는 행정규제로 일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나 민간 재해 예방 기관도 예측 가능한 사업을 할 수 있단 이유로 서류 규제 선호 현상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안전규제의 현장작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은 산업안전감독이다. 산업안전감독(관)의 양과 질은 그 나라의 산업안전수준과 비례한다."

박 이사장이 발제문에서 제시한 대책은 당연히 현장점검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특히 현저히 부족한 전문 산업안전감독관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박 이사장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산업안전감독관은 700명 정도입니다. 전국 250만 개 사업장을 관리하려면 감독관 한 명당 3천500개 정도 사업장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박 이사장의 분석입니다. 이 숫자부터 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산업안전감독관에는 전문성을 갖춘 특별사법경찰관이 임명되도록 해, 실질적으로 현장 규제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고도 강조합니다. 


이런 사전 규제적 관점 외에도 박 이사장은 사후 처벌에 대해서도 지적합니다. 박 이사장은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중대 재해에 대한 처벌이 미약하고, 그 미약한 처벌 마저 최고 경영책임자가 아닌 현장소장과 같은 하위 관리자에만 적용된다고 분석합니다. 법인인 기업 역시 책임을 면하는 상황입니다. 결국, 처벌받는 사람과 책임지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불안전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고 봅니다. 박 이사장은 이는 결국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입법 활동을 통해 해결돼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박두용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의 발제 내용은 사실 그동안 지적돼 오던 부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 신분으로 발제한 것임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박 이사장이 지적한 현재 산업재해 예방 활동을 직접 수행하는 기관의 수장이 밝힌 의견인 만큼 나름의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발제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밝힌 입법 기관(국회)에 박 이사장 스스로 피감기관 수장으로서 출석할 것인 만큼, 문제 해결에 대한 실질적인 기여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민경호 기자ho@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