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IN] '자막틀면 되잖아요' 항의만은..코로나 전문 수어 통역사의 하소연

박유연 기자, 신재현 외부기고가 2020. 5. 3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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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째 정부 코로나19 브리핑 참여

경력 20년 고은미 수어 통역사

‘3차까지 시험, 전문 자격 직업’

‘저런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평소 궁금한 직업이 있으셨나요? 다양한 직업인들을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는 ‘직업IN’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매일 국민들의 눈과 귀가 쏠리는 코로나19 브리핑 현장.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같은 정부 관계자 만큼이나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 바로 옆에서 브리핑 내용을 수어로 전달하는 수어통역사다. 수어통역사는 현장에서 유일하게 마스크를 끼치 않은채 몸짓 외에 표정으로도 브리핑 내용을 전달한다. 베테랑 고은미(42) 수어 통역사를 만나 수어 통역사의 세계에 대해 들었다.

정은경 본부장 브리핑을 통역하는 고은미 통역사 /본인

◇좁은 공간에서도 마스크 낄 수 없는 직업

수어 통역사는 귀가 들리지 않는 농인(청각장애인)을 위한 동시 통역사다. 국내 농인의 수는 약 35만명. 청인(非청각장애인)의 언어인 말소리를 농인의 언어인 수어로 통역한다. 수어는 손동작만 포함하지 않는다. 얼굴 표정, 몸의 방향 같은 비수지 (非手指) 기호도 수어의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입술이나 눈썹 모양을 어떻게 하고 몸통을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돌리느냐 등에 따라 수어 의미가 달라진다. 코로나 브리핑에서도 통역사들은 표정과 손짓을 십분 활용한다. 그래서 좁은 브리핑장에서도 유일하게 마스크를 낄 수 없다.

마스크 뿐 아니다. 표정과 몸짓 외에 다른 게 주목의 대상이 돼선 안된다. 장신구를 착용할 수 없고, 옷은 검정 등 무채색 계열만 입는다. 그래야 오로지 수어에 집중시킬 수 있다. "수어 통역사에게 옷은 칠판이에요. 칠판 색이 튀거나 무늬가 있다면 글씨를 읽을 수 없잖아요. 통역사의 옷도 마찬가지에요. 옷 색깔이나 디자인이 튀면 시선이 분산돼요. 그래서 단추가 달려 있거나 반짝거리는 재질의 옷도 피합니다."

외교부 브리핑을 통역하는 고은미 통역사 /본인

◇난이도 최상의 코로나 브리핑 통역

고은미 통역사의 경력은 올해로 20년째다. 한 대학에서만 18년 근무했다. 농인 학생이 듣는 강의마다 찾아가 강의 내용을 수어로 전달했다. 지금은 대학을 나와 프리랜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정부와 인연은 문화체육관광부 브리핑에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문체부는 작년 12월 정부부처 가운데 처음으로 수어 통역사를 브리핑에 배치했다. 이후 고씨는 코로나19 브리핑에도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19 브리핑은 중요도만큼이나 난도 높은 통역 현장이다. 우선, 사전 자료가 없다. 다른 통역에선 사전 자료가 주어진다. 어떤 내용의 브리핑인지, 어떤 표현이 쓰이는지 사전에 자료를 검토하면서 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 정례브리핑은 매일 급박하게 전개돼 그럴 여유가 없다. 브리핑대 오르기 직전까지 수치가 바뀌고 내용이 수정된다. 카메라가 돌고 나서야 겨우 보고하는 사람의 어깨 너머로 자료를 볼 수 있다.

법무부 브리핑을 통역하는 고은미 통역사 /본인

긴 브리핑 시간도 고역이다. "10분 내외 발표에 취재진 질의응답까지 합하면 한 시간 가량 진행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의 통역을 사전 준비 거의 없이 하려니 무척 긴장하게 됩니다. 자칫 실수하지 않을까 브리핑 내용에 고도로 집중하게 되죠."

의학용어 같은 생소한 용어 사용도 어려운 부분이다. ‘코로나19’ 병명부터 난관이었고, 사태 해결에 관계되는 정부 부처가 많아지면서 각종 어려운 행정용어까지 등장했다. "생소한 표현이 등장할 때마다 한국농아인협회와 공공 수어 브리핑 통역사들이 모여 표현을 정합니다. 문자 그대로 수어로 전달하는 ‘지문자’ 통역 방법이 있긴 한데요.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어의 뜻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의역 통역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예를 들어 ‘코호트 격리’를 지문자로 통역하면 그냥 써서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는데요. 그보다 ‘병원 집단 격리’로 풀어서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할 수 있죠."

중앙사고수습본부 브리핑을 통역하는 고은미 통역사 /본인

배경지식을 많이 공부해놓으면 도움이 된다. 관련 기사나 유튜브 영상을 매일 확인한다. "누리꾼들이 단 댓글까지 일일이 봅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미리 공부해 놓으면, 취재진 질의응답에 나올만한 질문을 예측할 수 있고 대응하기 쉬워집니다." 통역사끼리 함께 준비하기도 한다. 단체 메신저 대화방을 만들어 기사를 공유하고 브리핑에 나올 만한 내용을 함께 추려본다. "코로나19 브리핑에 참여하는 10여명의 통역사들이 한 팀처럼 움직입니다. 워낙 위중한 사안이니까요. 한 사람 당 통역 업무는 일주일 2~5회 사이입니다. 정례 브리핑 외에 대책 발표 등 수시로 브리핑이 열리거든요. 문체부 산하 국립국어원이 수어 통역사들의 배정과 지원을 담당합니다."

코로나19 브리핑 이후 수어에 관심을 갖고 수어 통역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청인이 크게 늘었다. "많은 농인 분들이 수어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크게 달려진 것 같아 좋다고 얘기해 주세요.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통과되면서 수어가 국어 중 하나로 인정되긴 했지만 생소하게 보는 시각이 기존에 많았거든요. 이번 브리핑을 계기로 수어가 공식 언어로 자리를 잡으면 좋겠습니다."

수어에 대한 관심은 문화 캠페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와 싸우는 현장 의료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수어로 표현하는 ‘덕분에 챌린지’가 그것. 고은미 통역사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덕분에 챌린지’ 영상에서 박양우 장관에게 수어를 가르치며 함께했다. "많은 분들이 수어에 관심을 갖고 배워보실 수 있도록 쉬운 표현을 소개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브리핑을 통역하는 고은미 통역사 /본인

◇3차 시험 거쳐 자격증 취득

수어 통역은 이용이 계속 늘고 있다. 가장 익숙한 게 방송 수어 통역이다. TV 화면 오른쪽 하단의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을 수어로 전달한다. 학교에서 강의 내용을 전달하고, 근로 지원이나 의료 통역 수요도 있다.

수어통역사가 되려면 2006년 도입된 국가 공인 수어 통역사 자격증을 따야 한다. 시험은 3차에 걸쳐 진행된다. 1차는 필기시험으로 한국어의 이해, 장애인 복지 등 네 과목으로 진행된다. 2차는 수어 통역 실기시험, 3차는 합격자 연수다. 대한민국 국적의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 한국농아인협회에 따르면 작년 12월 기준 총 자격증 취득자는 1818명이다.

자격증을 딴 후에는 실전에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 말하는 이의 의도나 맥락을 빠르게 짚을 줄 알아야 한다. 화자가 말을 중언부언해도 맥락 속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해 재빨리 전달할 수 있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국어 실력도 중요하다. 수어를 음성으로 통역할 경우도 있는데, 어휘력과 문장력이 좋아야 내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브리핑을 통역하는 고은미 통역사 /본인

마음가짐과 태도도 중요하다.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영어권 문화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어감이나 느낌 등을 전달하기 어렵잖아요. 수어 통역도 마찬가지예요. 농인들의 문화와 사회에 대해 잘 알아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요. 열린 사고로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죠."

◇’집중 안된다’ 항의, 비장애인 인식 아쉬워

-사회 인식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요.

"코로나 브리핑을 계기로 수어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쉬운 부분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어요. 정부 당국자가 브리핑하는데 수어 통역사가 손을 움직여서 내용에 집중이 안 된다는 비장애인 항의가 몇몇 있었거든요. 농인들 때문이라면 자막을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리 없는 자막은 말의 어감이나 느낌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알기 어렵죠. 청인들도 글로 읽는 것보다 직접 이야기를 들을 때 더욱 실감이 나잖아요. 불편하게만 보시지 말고 포용력 있게 바라보시면 좋겠어요."

교육부 브리핑을 통역하는 고은미 통역사 /본인

-수어통역사 자체에 대한 인식에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하나의 직업으로 봐주시면 좋겠어요. ‘수어 통역’ 하면 자원봉사로 보는 시선이 아직 많은 것 같아요. 수어 통역사라고 직업을 소개하면 ‘좋은 일 한다’, ‘자원봉사자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세요. 그런데 수어 통역사는 누굴 도와주는 직업이 아니에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하는 전문 직업이죠. 있는 그대로 저희를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수어 통역사가 되고 싶나요.

"신뢰감을 주는 통역사가 되고 싶어요. 누구보다 깔끔한 통역을 하고 싶어요. 통역에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으면 듣거나 보는 분이 따로 자료를 찾아 보게 되는데요. 그렇지 않고 누구나 즉시 이해할 수 있는 통역을 하고 싶습니다."

◇문체부, 한국수어발전기본계획 추진

수어 담당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18년 ‘제1차 한국수어발전기본계획(2018-2022)’을 발표한 바 있다. ▲한국수어 능력 향상 및 보급 ▲한국수어 관련 제도의 안정적 운영 기반 마련 ▲한국수어 사용 환경 개선을 위한 기반 구축 등을 3대 과제로 한다.

한국수어교육원을 지정, 관리함으로써 전국 어디서나 수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한국수어교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내용을 포함한다. 문체부는 공공기관 및 수어 관련 기관 취업 등에 활용될 수 있도록 2019년부터 한국수어교육능력 검정시험을 실시하고, 한국수어능력 검정시험은 2020년부터 실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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