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300년전 정식 스님이 된 자식을 위해 보내는 택배일까"..경주 황복사터 출토 목간의 정체는?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2020. 5. 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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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황복사터에서 확인된 명문목간. 확실치 않지만 ‘小○ 寺 迎談沙彌 卄一’로 읽을 수 있다. 21살로 구족계를 받은 자식을 위해 보내는 물품 꼬리표 목간일 수 있다. |성림문화재연구원 발굴

‘소○ 사 영담 사미 21년(小○ 寺 迎談沙彌 卄一年)’. 654년(진덕여왕 8년) 의상대사(625~702)가 출가한 사찰로 알려진 경북 경주 황복사터에서 의미심장한 명문 목간 1점이 확인됐다.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된) 황복사의 영담 사미승(21살)을 위해 폐백’을 보내는 택배 물품 꼬리표일 가능성이 있는 목간이다.

31일 학계에 따르면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의 구황동 황복사터를 발굴한 성림문화재연구원이 사찰명과 사미승(구족계를 받기 전의 남자 승려), 21살로 읽을 수 있는 명문목간 1점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황복사터에서 발굴한 금동불입상 및 보살상. 문화재청 제공

아직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되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명문 해독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다만 최근 명문의 대강을 직접 검토한 저명한 서각연구자는 이 목간이 택배 꼬리표인 것으로 판단한다. 이 연구자에 따르면 명문 중 첫머리는 확실치 않지만 ‘소○(小○)’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황복사의 원 이름이 ‘소○사(小○寺)’일 수도 있다. 또한 ‘사(沙)’ 다음의 글자는 ‘미(彌)’로 해독될 수 있다. ‘사미’ 앞의 이름 두 자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영담(迎談)’으로 해독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영담 사미’로 읽힌다. 그 다음 숫자인 ‘21년(卄一年)’은 비교적 작은 글씨로 쓰여있다. 연구자는 “지금으로 치면 사람 이름 다음에 괄호로 나이를 표시한 것일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영담 사미승(21)’ 이런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목간의 정체는 무엇인가.

12지산 기단건물지인 사각모양의 연못. 2017년 발굴에서 찾아냈다. 문화재청 제공

‘사미(沙彌)’와 ‘이십일년(卄一年)’이라는 명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이 연구자의 이야기다. 사미는 불교교단에 처음 입문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수행하는 남자 승려를 가리킨다. 즉 남자가 처음 출가하면 6개월 또는 1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기간 승려의 자질을 가다듬고 은사를 정한 뒤 사미계를 받아 사미가 된다. 그러다 만 20살이 되면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승려)가 된다. ‘만 20살’은 ‘한국 나이’로 21살이다. 따라서 이 연구자는 이 목간에 ‘영담’이라는 이름의 사미승이 21살이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2017~2019년 사이 황복사터에서 찾아낸 십이지신상. 양·말·뱀·토끼·소·쥐·돼지·개 신상(神像)이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게다가 이 목간의 맨 밑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물품을 보낼 때 달았던 꼬리표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목간은 ‘황복사로 출가한 뒤 만 20살이 되어 구족계를 받아 정식승려가 된 (영담)사미에게 물품을 보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게 이를 직접 본 연구자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이 목간은 ‘황복사로 출가해서 만 20살이 되어 정식 승려가 된 자식을 위해 보내는 선물’에 붙은 택배 물품 꼬리표일 수 있다. 물론 아직 학계 논의가 되지 않았기에 확실치는 않다. ‘미(彌)’자와 ‘영담(迎談)’도 그렇고, ‘21년(卄一年)’도 나이인지, 또 그 중에서도 법랍인지 세수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연구자들도 있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발굴결과에서 황복사라는 절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고, 목간 또한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아 정확한 판독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황복사터. 1942년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황복사탑 사리함에서 확인된 명문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을 통해 종묘의 기능을 한 왕실 사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적외선 촬영을 하면 비교적 정확한 해독이 가능해질 것 같다. 황복사는 1942년 이곳의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황복사탑 사리함에서 확인된 명문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을 통해 종묘의 기능을 한 왕실 사원일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당시 삼층석탑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도 확인되어 주목을 받았다. 2016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 시대(7~9세기)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 등 각종 건물터와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 유구를 발견한 바 있다. 최근 발굴에서는 금동불상 7점을 비롯, 비석조각, 치미, 녹유전 등 1,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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