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1mm라도 당기길 바라며, 온갖 걸 고민하는 게 SF 작가" [커버스토리]

장은교 기자 입력 2020. 5. 30. 06:00 수정 2020. 6. 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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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정소연 작가가 말하는 'SF를 쓰는 마음'

[경향신문]

정세랑 작가(왼쪽)와 정소연 작가는 SF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나아가고 싶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상훈 기자 doolee@kyunghyang.com

정세랑 작가는 지난 1월 출간한 SF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작가의 말에서 “2020년은 SF단편집을 내기에 완벽한 해가 아닌가 싶다”고 썼다. 2010년 등단 후 <지구에서 한아뿐> <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 피플> 등 다양한 소설을 쓰며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정 작가는 “아무래도 스스로를 생각할 때 판타지 작가인 것 같지만, 종종 SF를 썼고 참새와 박새가 수가 모자랄 때 서로서로 무리 지어 지내는 것처럼 SF작가들과 오랜 우정을 나누어왔으므로 이 책을 꼭 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지구의 여섯번째 대멸종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봐 두려워하는 그는 지구생명체의 공존을 위해 화살표를 그리는 마음으로 SF를 쓴다.

정소연 작가는 2005년부터 SF를 썼다. 옆집에 어딘가 측은한 외계인이 살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듯 평행세계를 여행하며, 장애를 가진 여성이 우주를 탐사하는 그의 소설 속 세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받는다. 2015년 발표한 SF단편집 <옆집의 영희씨>는 일본에도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 변호사이자 번역가, 칼럼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SF를 즐길 수 있도록 지면을 만들고, 작가들의 힘을 모으는 일에도 앞장섰다. 저소득 국가의 여학생들에게 배울 권리를 찾아주는 활동도 하고 있다. 일상을 빼곡하게 살며 느끼며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의 SF에 녹아 있다. 지난 19일 두 작가를 만나 ‘SF를 쓰는 마음’에 대해 들어봤다.

정세랑 작가의 SF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왼쪽 사진)와 정소연 작가의 SF단편집 <옆집의 영희씨>.

SF가 이전보다 사랑받는 건
사회 분위기와 관련 있는 듯
성별·젠더중립성 등 문제
거의 10년 전부터 고민해와
기존 문학의 불편함 적어

- SF가 이전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들 합니다. SF작가로서 변화를 느끼나요.

정세랑(이하 세랑) = 네. 작가군도 두꺼워지고 독자분들도 많이 늘어서 이젠 정말 잘 자리 잡은 장르가 되었구나 느껴요.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이 주인공인 SF, 우리 사회의 고민이 깃든 SF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죠.

정소연(이하 소연) = 제가 2009년부터 SF 관련 강의를 해왔는데 예전에는 SF영화나 게임 등 다른 미디어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요즘은 한국 SF소설을 인상 깊게 읽었다거나 작품을 쓰고 싶다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전체적인 향유층이 두꺼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 이유가 뭘까요.

소연 = 최근 몇년간 사회 분위기와 상관이 있는 것 같아요. 독자들이 기존 문학을 읽을 때 느껴지는 불편함들이 있는 거죠. SF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기 때문에 그 불편함에 걸릴 가능성이 좀 낮아져요. 예를 들면 한국 SF에선 주인공의 성별이나 젠더중립성 문제를 거의 10년 전부터 고민해왔거든요. (한국어는 성별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고도 쓸 수 있기 때문에, 한국 SF작가들은 일부러 등장인물들의 성별을 모호하게 쓰기도 하며 번역출간될 때도 이 부분을 고민한다.) 문단문학을 읽을 때 정확히 무엇 때문에 불편했는지 잘 모르더라도, SF를 읽으면 뭔지 모르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 거죠.

세랑 = 지금까지 태어나서 알고 있던 세계가 흔들리는 느낌이 왔을 때, 그때 손이 가는 문학이 SF인 것 같아요. 항상 격변기가 있잖아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다 겪은 세대는 그렇지 않은 세대와 다르겠죠. 기존의 방식에 안주해도 괜찮은 시대가 있는가 하면 지금 바꾸지 않으면 큰일 난다 이런 위기감이 오는 시기가 있는데, SF는 공동체의 큰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더 주목받는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생태주의적인 관점은 SF에선 늘 있어왔는데요. 코로나19도 그렇고 지구온난화도 그렇고 더 이상은 가려지지 않게 드러난 부분이 생긴 거죠.

소연 = 개개인의 세계가 급격히 넓어졌다는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SNS 등 여러 플랫폼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인식하는 세계가 커졌잖아요. 지금 여기 서울에 앉아 있지만 내가 보고 있는 세계는 훨씬 더 넓은 거죠. 경험세계보다 더 넓은 세계를 가지는 게 SF의 특징이기 때문에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보통의 소설보다는 SF에서 다루는 세계의 크기가 (자신과) 더 맞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안 하던 질문을 하도록 하고
작가·독자 사이의 게임 강해
답이 없는 현실 세계의 문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게 매력

- 두 분은 SF의 어떤 점이 좋았나요.

세랑 = 음… 물음표가 커다란 거요. 안 하던 질문을 하게 하는 것에 대한 자극이랄까요. 정말 완전히 다른 세계를 그렸을 때 어떤 특수효과보다도 멋진 세계가 그려지잖아요. 작가가 밑그림을 그려주지만 색채나 디테일은 읽는 사람이 채워넣게 되잖아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게임이 굉장히 강한 종류의 문학이 아닐까 생각해요.

소연 = 저는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현실의 여러 문제에는 사실 답이 없잖아요. SF는 경험세계를 벗어난 것을 다루면서 ‘이쪽 방향으로 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이쪽으로 가면 망할 것이다’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굉장히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이라도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보다는 세계가 반드시 넓어져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이곳’에 있지만, 제가 보는 창이 바뀔 수 있는 거죠. 이쪽으로 넓어질 수도 있고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도 있고요. 창이 넓어지면서 현실생활에선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어떤 존재를 상상하게 되고 200년, 300년 후를 생각하게 되니까요.

- 정세랑 작가님은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작가의 말’에서 “문명이 잘못된 경로를 택하는 상황을 조바심 내며 경계하는 것은 SF작가의 직업병일지 모른다”고 썼습니다. 정소연 작가님은 <옆집의 영희씨> ‘작가의 말’에서 “나의 글이 당신을 위로했기를 바란다”고 썼죠. SF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SF를 쓰는 마음은 어떤가요.

세랑 = 세계가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이 있잖아요. 세계가 다다라야 할 그 지점은 제 수명 안에 안 올 수도 있지만, 일단 시선을 멀리 두고 그 세계를 쓰면 누군가 읽고 대화하는 와중에… 아주 약간이라도 1㎜라도 당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에 대해 쓰는 것만으로도. 그 세계를 내가 못 만난다고 해도 화살표를 만드는 거죠.

소연 = 온갖 걸 다 고민하는 사람들이 SF를 쓰는 것 같아요.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SF를 읽었을 때 재미있고 뭔가 발견하고… 막연하게 불편한 게 있었는데 그게 이 사람(작가)이 하는 질문이랑 비슷하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늘어나는 거죠. 문제의식의 동시대성이 생기면서요. 작가마다 SF를 보는 관점이 다르겠지만, 저에겐 SF가 안도감과 낙관을 주는 장르, 세상을 보는 창을 움직여주는 장르이니까 제가 쓰는 글도 독자에게 그런 글이 되길 바라죠.

- 정세랑 작가님의 <리셋>을 보면 거대 지렁이가 지구를 덮친 뒤, 인류는 환경파괴가 일상이던 삶의 방식을 ‘리셋’하고 새로운 지구생활을 만들어갑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따뜻한 사람들의 선한 의지가 궤도를 바꾸고 결국 희망을 찾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인 판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세랑 = 저는 어쨌든 ‘한 사람’의 힘을 믿는 것 같아요. 사회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보다 어떤 개인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일본 책을 편집해주셨던 분이 대지진을 겪고 나서 집에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사세요. 전기를 쓰면 이 인구 단위에서는 원전을 더 지을 수밖에 없는데 일본은 언제든 지진이 다시 올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거예요. 저는 그분의 건강이 너무 걱정되지만… 그 선한 의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기고, 한번 더 에너지에 대해 고민하는 마음들이 생기잖아요. 저는 그 한 사람 한 사람한테서 출발하는 선한 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있어서 SF를 써요.

현실을 묻고, 미래를 보여주는 SF 2020년의 독자들은 SF를 보며 SF 속에서 살고 있다. 왼쪽부터 인공지능 알파고와 세기의 바둑대국을 펼친 이세돌 기사(2016년),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아이, 로봇>(2004년), 2017년 한국에서 벌어진 생리대 안전성 검사 시위와 ‘생리 없는 세상’을 그린 코니 윌리스의 소설 <여왕마저도>(1992년).

소수의 사람들만 즐긴다는
오래된 편견을 걷어내길
사회과학·인문·철학 포함
너무나 넓은 세계가 존재
새로운 경이감 느낄 수 있어

- 작업 루틴이 궁금해요. SF작가들은 과학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세랑 = 저는 인터뷰를 굉장히 많이 해요. 어떤 직업이나 경험을 갖고 계신 분들에 대해서요. 관심 있는 주제가 생기면 5~6년 동안 정보를 끌어모으는 ‘정보호더형’ 작가예요. 연구보고서, 박물관에 비치된 발굴조사 자료, 구술사 채집록 등등 판매되지 않는 자료들을 열심히 읽고 참고하는 편이에요. 환경에 대한 책들은 정말 빨리 멸종(절판)돼요(웃음). 보통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떠오르면 그다음은 점선그리기처럼 써나가는 편인데, 잘 안 풀리면 자료를 더 찾고 더 읽어요. 일하는 것은 직장인과 비슷해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말만 빼고 매일 꼬박꼬박 쓰는 편이에요.

소연 = 저는 과학서적은 거의 안 읽어요. SF가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소설은 아니고, 또 뭘 공부하면 자꾸 그걸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 있는데 작품성 면에서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쓰려고 노력해요. 저는 계층성, 운동성, 소수자성 쪽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쪽의 인풋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국정감사도 열심히 보고, 국회TV도 많이 보고요. 기본적으로는 다른 소설들을 정말 많이 읽어요.

- 다른 SF작가들과 함께 지난해 SF무크지 ‘오늘의 SF #1’을 만들었죠. 정소연 작가님은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2018~2019년)로도 활동했습니다.

세랑 = 이제 막 등장하는 작가들을 위한 지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독자들에게도 여기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쓰는 분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요. 원고료를 높이는 것도 목적이었어요. 이상하게 (문단문학에 비해) 장르 작가들에게는 원고료를 적게 주려는 경향이 있어서 그것도 좀 바꾸고 싶었어요.

소연 = 지면이 없으니까 작품을 웹에 발표해 공짜가 돼버리는 경우도 많거든요. 2018년에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동료를 찾아보자’는 마음이 컸어요. 일종의 노동조합처럼요. 특히 신인 작가들이 계약할 때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기성 작가들이 정보를 주기도 하고요. 각각 흩어져서 작업하던 작가들의 고립감을 해결해보고 싶었던 거죠.

- SF가 여전히 낯선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소연 = SF는 소수의 사람만 즐기는 것이라는 것 자체가 저는 오래된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게임 등 워낙 다양한 분야와 결합이 가능한 장르라서 ‘다른 미디어의 간섭’이 심할 수 있죠. 어떤 SF영화가 취향에 맞지 않았다고 해서, SF소설도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해버리는 일이 발생하죠. SF는 테크놀로지 픽션이 아니에요. 사회과학을 넘어 인문, 철학, 신학도 포함하죠. 좋은 SF를 만나시면, 새로운 경이감을 느끼게 될 거예요.

세랑 = 작품 리뷰를 보면 절반 정도는 “나는 이 장르는 좋아하지 않는데…”로 시작해요(웃음). 장르문학의 경우 문을 열어야 하는 과정을 한번 더 거쳐야 하는 거죠. SF의 세계는 너무나 넓기 때문에 잘 맞는 작가나 작품을 만날 때까지 조금만 더 시도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떤 소설 한두 권 읽고 나서 문학을 싫어해라고 하진 않잖아요. 작품 몇 개만으로 장르를 통째로 버리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요. SF의 세계는 정말 멋지거든요.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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