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말고 마음!" 그녀는 '쫙쫙' 혼인증서를 찢었다
"세번째 춘향, 두번째 몽룡.. 첫사랑처럼 설레요"
창극단, 코로나 사태 뒤 국립예술단체 중 처음 공연
우리 소리 힘 빛나는 무대.. 달오름극장서 24일까지
“난 혼인증서 따위는 믿지 않아요!”
춘향은 검은 먹 글씨가 가득 적힌 흰 종이를 쫙쫙 소리나게 찢었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국립창극단 ‘춘향’(연출 김명곤·작창 유수정)의 1막, 춘향과 몽룡이 첫 사랑의 노래를 부르기 직전. 춘향은 ‘제 마음을 믿어 달라’며 몽룡이 써온 혼인증서를 찢어 바닥에 훌훌 털어버렸다. 깜짝 놀란 몽룡이 종이가 아닌 ‘진심’을 내밀었다. “그대 향한 굳은 사랑, 상전이 벽해 되고 벽해가 상전이 되도록 변하지 않을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그제서야 춘향도 화답했다. “그대 향한 굳은 사랑, 이 목숨 다하도록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중요한 건 종이에 쓰인 글씨가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자기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해가는 것. 전에 없던 새로운 춘향이 무대 위에 태어나는 순간이다.

춘향이가 달라졌다. 김명곤이 연출하고 창극단 유수정 예술감독이 작창한 ‘춘향’은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익숙하다. 제목이 ‘춘향전’인데도 몽룡의 시선에서 진행됐던 과거의 이야기는 주인공 춘향의 시점으로 180도 바뀌었다.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는 춘향에게 반한 몽룡이 방자를 시켜 ‘얼굴 한 번 보자’며 부르지만, 춘향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양반이 부르면 무조건 가야 하니? 난 못 가. 사또 자제면 자제지 초면에 오라가라 들이대도 된단 말이냐?”
‘춘향’ 이소연(36)과 ‘몽룡’ 김준수(29)를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국립창극단 단원인 두 사람은 수많은 작품에서 주역을 맡으며 팬층도 두터운 ‘창극단 아이돌’. 이소연은 세번째 춘향, 김준수는 두번째 몽룡이다.

◇세번째 춘향, 두번째 몽룡… “첫사랑처럼 설레요”

‘10년 만에 세번째 춘향이니, 이 정도면 춘향이 직업’이라고 했더니, 이소연 배우가 웃었다.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두근두근해요. 아주 전통적인 춘향이었다가, 서구의 시선으로 본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춘향이었다가, 이번엔 현대적 성격의 당당한 춘향이지만 판소리의 아름다움은 잘 살아있는 작품이거든요.”
2010년 김홍승 연출의 ‘춘향 2010’이 창극단 주역으로 무대에 선 첫 춘향. 대사도 거의 ‘예’ 밖에 없었던 전통적인 작품이었다. 춘향의 감정은 오로지 소리로만 전달돼, 배우로 덜 익숙했던 젊은 소리꾼 이소연에겐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2014년 세계적 오페라 연출가가 연출한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은 파격적 연출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은 뒤 저한테 피를 한 바가지 쏟아붓기도 하고, TV뉴스에서 본 것 같은 서양 죄수들의 주황색 죄수복을 입고 새장에 갇혀 공중에 들려지기도 하고….”
두 사람은 이번 작품에서도 찰떡 호흡을 자랑한다. 특히 ‘사랑가’를 부르며 춤 추면서 합을 맞추는 장면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호흡 조절과 힘 배분이 극도로 난해했다. 김준수는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에서 몽룡으로 춘향 이소연과 함께 공연한 뒤 이번이 두번째 ‘몽룡’. 그는 “호흡을 정리하고 숨차지 않도록 유지하는게 정말 어렵다. 무대에 서면 침이 바싹바싹 마른다”며 웃었다. “너무 힘든 안무는 안무 선생님께 조율해달라 말씀드린 부분도 있지만, 또 장면의 아름다움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장면들도 있었어요. 연출님도 사랑가에 정말 공을 많이 들이셨고요. 춘향과 몽룡만 따로 데려다가 계속해서 연습을 시키셨죠.” 이소연이 “준수씨는 원래 춤을 잘 춰서 괜찮았다”고 하자, 김준수는 “에이, 누나 무슨 소리야” 하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김준수는 올 초 창극 ‘패왕별희’에서도 고운 춤사위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이소연이 말했다. “여자보다도 선이 예쁜 몽룡이라,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소리꾼인 저희가 무용수 수준까지 갈 수는 없으니까, 둘 만의 호흡이나 눈빛으로, 연기로 메꾸려고 노력했죠. 최대한 처음 만나는 사랑하는 연인처럼 바라보고 느끼고.” 김준수는 “춘향에서 ‘사랑가’는 두 젊은 연인의 사랑이 가장 아릅답게 꽃 피는 시간이어서, ‘사랑가’가 아름다울수록 ‘이별가’가 더 슬프고 빛난다. 그 장면을 관객들이 아름답게 느끼도록 표현하려 애썼다”고 했다.
◇홀로 또 같이 무대를 꽉 채우는 춘향과 몽룡의 절창

춘향은 ‘사랑가’를 부를 때도 몽룡이 ‘앞태를 보자’ 하면 뒤로 가고, ‘뒷태를 보자’ 하면 앞으로 다가오는 ‘밀당’(밀고 당기기)의 고수다. 순종적이며 정절의 상징이던 옛날 사람이 아니라, 요즘 젊은이처럼 발랄한 춘향과 몽룡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 ‘춘향’은 이런 현대적 성격에 더해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담는 창극의 본질에도 더욱 집중했다. 김명곤 연출과 창극단 유수정 예술감독은 “우리 소리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고, 창극단의 소리꾼들이 각자 소리를 뽐내는 장면들이 다수 등장해 관객의 귀를 즐겁게 한다.
여기서도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홀로 토해내는 소리의 힘 만으로 무대를 꽉 채워내는 이소연과 김준수의 절창이다. 소리꾼 이소연의 매력은 전통적으로 익숙한 탁성과 결이 다른, 전달력 뛰어난 맑은 목소리. 마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듯 관객을 자신의 소리와 극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김준수는 순정만화를 찢고 나온 것 같은 잘생긴 외모와 달리 굵고 힘있는 소리에 반전 매력이 있다. 특히 어사 출두 장면에서는 무대 위에서 혼란스럽게 뒤엉키는 다른 배우들을 뒤로 하고 홀로 돌출 무대에 서서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받으며 소리를 한다. 콘서트장의 록스타 같다.

이소연은 “연습 때도 ‘오늘의 초대가수~’ 하면 준수가 마이크를 위로 던졌다가 잡으면서 등장하곤 했다”며 웃었다. 김준수도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물병을 위로 던졌다 휙 잡아채 보이더니 “관객의 숨소리도 들릴 것 같은 최전방에서 독창하듯 소리를 해야 하니까 정말 긴장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 소리에 대해서도 좀 더 힘을 주고, 스스로도 록 콘서트를 하는 것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려 노력해요.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관객을 사로잡고 싶다는 마음으로. 힘과 감정을 극 전체에 균형감있게 배분하는데도 주의하죠. 이 어사 출두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줘야 하니까요.”
홀로 소리의 힘 만으로 무대를 꽉 채우는 힘이 놀라운 건 춘향을 맡은 이소연도 마찬가지. 특히 몽룡을 떠나 보낼 때의 ‘이별가’와 옥중에서 곤장을 맞으며 부르는 ‘십장가’는 폭발적이다. 이소연은 “몽룡을 떠나보내며 ‘이별가’를 부르고 1막이 끝났는데, 연주해 주시는 선생님 한 분이 ‘너 오늘만 사냐, 오늘만 하고 공연 그만 할 거냐’ 하시더라”며 웃었다. “이번 작품은 특히 춘향의 슬픔이 독보적으로 펼쳐지는 장면이 많아요. 정말 혼을 갈아 넣는 기분이죠. 내가 이 부분에 혼을 갈아 넣지 않으면 사람들이 감동할 수 없겠구나, 울분을 토하는, 오장이 찢겨지는 마음을 소리로 표현해야겠구나 생각해요. ‘소리꾼이 연기하고 나서 이제부터 소리하는구나’가 아니라, ‘배우가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걸 소리로 표현하는구나’라는 걸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창극이 그래서 어렵지만 또 그래서 더 매력적이죠.”
◇수십년 갈고 닦은 창극단원 소리가 빛나는 무대

월매, 향단, 방자 등 주목받는 조연급 배역 뿐 아니라, 다른 창극단 단원들이 수십년 갈고 닦아온 각자의 소리 실력을 발휘하는 장면이 많아진 것도 이번 ‘춘향’의 매력 포인트. “창극은 동시대 의식과 감성에 맞춰 변화하되 뿌리인 판소리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창극단 유수정 예술감독의 지론이다. 연출가 김명곤은 직접 각색한 영화 ‘서편제’(1993)에 직접 출연해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국립창극단 최초 완판 장막창극 ‘춘향전’(1998)의 대본을 쓰고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의 각본도 맡았던 경력이 있다. 두 사람이 “우리 소리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자”고 의기투합했으니, 이번 ‘춘향’엔 다양한 우리 소리를 다양한 소리꾼들의 목청으로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김준수는 “완창 춘향가는 짧게는 6시간, 길게는 8시간이다. 그 긴 소리를 축약해서 창극에 담으면 여러 캐릭터의 매력을 충분히 담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이번엔 통통 튀는 감초같은 역할을 맡으신 창극단 선생님들이 자기 소리를 들려주세요. 그 향연을 듣는 것 만으로도 우리 소리를 좋아하는 관객 분들은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남원에서 춘향제가 열려야 하는 꽃피는 5월, 하지만 여전히 코로나 사태로 사회 전체가 조심조심 숨죽이고 있다. 김준수는 “저희도 공연을 할 수 있을까 가슴 졸였지만, 이런 위기를 뚫고 공연을 보러 와주시는 관객 분들께 저희가 받는 박수보다 더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돌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소연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춘향이 또 새로운 해석으로 이렇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건 고전이 가진 힘, 고난과 역경을 뚫고 솟아나는 사랑의 힘 때문일 것 같아요. 그 질긴 생명력, 죽지 않는 힘…. 많은 분들이 여전히 어렵고 힘드시지만, 저희 공연에서 사랑의 힘, 밝은 기운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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